“평생 책임져 주세요” 매달리더니 변심한 ‘오빠’ 부모님

국민일보

“평생 책임져 주세요” 매달리더니 변심한 ‘오빠’ 부모님

홍예숙 사모의 신유의 은혜 <16>

입력 2019-10-24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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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균 서울 대망교회 목사가 1993년 전도사 시절 경남 함양 반석성결교회에서 진행된 성찬예식에서 포도주와 빵을 나눠주고 있다.

경남 함양과 부산 고신대를 왕래하며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급하게 학교로 전화가 왔다. 집이었다. 문제의 청년 ‘오빠’가 죽어간다고 했다. 함양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지 몇 시간도 안 된 월요일 오후였다. 서둘러 함양행 차를 탔다. 정말 다 죽어가고 있었다. 기가 막혀 부둥켜안고 안수기도를 했다. 그러자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또다시 거센 파도가 몰려왔다.

“학교, 포기해.” 어머니가 매섭게 나를 몰아붙이셨다. “제 아들, 살려주세요. 학교 가지 말아 주세요.” 그리도 공부해야 한다고 도와주신 청년의 아버지도 매달렸다. “전도사님, 없으면 안 돼요. 하나님께서 전도사님 통해 우리 아들 살려주셨으니 학교 그만둬 주세요.” 그의 어머니도 매달렸다.

성적 우수자로 4년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고신대였다. 3년이나 벼르고 벼르다 들어간 학교였다. 학교를 포기하러 갔다가 그냥 시험을 치고 와 버렸다. 시험성적표가 왔다. 상상외로 좋은 성적이었다. ‘아, 하나님 뜻이 아닐까.’

그러다가 방학이 끝나고 말았다.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친구들이 수강신청을 대신 해 줬다. 감사한 일이었지만 내게는 커다란 괴로움이었다. 잊으려고 열심히 기도하고 찬양했다. 마치 처음에 은혜받았던 바위 위에 홀로 앉은 것처럼 느껴졌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위로해 주셔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다시 마음을 먹고 부흥회를 인도하러 다녔다. 환자들은 해외에서까지 소문을 듣고 와 교회 옆에 방을 얻었다. 문제의 청년도 점점 나아졌다. 몇 번의 고비를 거쳤지만 잘 넘겼다. 위기를 잘 넘기더니 신학교에 진학하겠다고 했다.

그의 가정도 이제는 예수님 없으면 살 수 없는 믿음의 가정으로 성장했다. 청년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집사님이 되셨다. 서울대 국사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의 동생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아들로 굳건하게 성장했다. 동생은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시작한 터라 교회에 매일 올 수 있었다. 믿음이 날로 성장했다.

내 마음에 ‘아버지, 저 아들도 주의 일 하면 잘하겠는데요’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조심스럽게 아버지 집사님께 말씀드렸다. “집사님, 저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시죠? 두 아들 다 하나님 일 하게 하시면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 기억하시죠?”

그러나 대답이 조금 달라졌다. “그래야죠. 그런데 큰아들은 주의 종으로, 작은아들은 공무원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형님을 돕죠.” 그래도 내 마음에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하시면 어쩔 수 없습니다. 일찍 포기하시죠. 제가 볼 때는 둘 다 훌륭한 목회자가 되시겠습니다.’

청년은 몸이 다 나은 후에 신학교에 진학하려 했다. 하지만 갑자기 신학 공부의 문이 열려버렸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십자군전도대에서 파송 받아 우리 교회에 오신 전도사님이 다짜고짜 서울신학대 신학대학원에 입학지원서를 대신 제출한 것이었다. 어차피 신학 공부를 할 것이면 기다리지 말고 당장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93년 3월 서울신대 신대원에 진학할 무렵 동생도 제대하고 서울대에 복학한 상태였다.

청년은 매주 먼 거리였지만 경기도 부천 서울신대에서 함양으로 내려왔다. 공부도 중요했지만 온전치 못한 건강이었기에 안수기도를 매주 받았다. 그는 아버지가 담임하시는 함양 반석성결교회의 전도사로 임명됐다. 갓 목사 안수를 받은 아버지의 사역을 나와 오창균 전도사가 보조했다.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내가 할 일이 많이 줄었다.

청년은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의 중책을 맡은 전도사로 자리 잡았다. 총명한 데다 믿음도 견고했기에, 맡은 일들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아버지를 도와 교회 일을 척척 잘도 해냈다. 그런데 그즈음 바로 그 청년, ‘오빠’가 내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다가왔다. 서로 오빠 동생으로 불렀기 때문에 마음이 다른 환자에 비해 편했다. 어느 날 문득 그 오빠로 인해 신학 공부를 포기해야 했을 때 그의 부모가 내게 조심스럽게 건넨 말이 생각났다.

“우리 아들은 전도사님 없으면 죽어요. 평생 책임져 주세요.” 그때는 너무나 급한 상황이었다. 중환자였기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이성으로 점점 내게 다가왔다.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피하면 피할수록 더 다가와 있는 그의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점점 건강해져 가는 전도사님, 서울대를 졸업한 인재인 만큼 실력도 좋았다.

그런 아들을 보는 그의 부모님에겐 아들이 점점 우상이 돼가고 있었다. 아프지 않았을 때와 같은 생각으로 돌아간 것이다. 우리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는 생각, 누구보다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을 지닌 그분들의 눈에는 몸이 불편한 내가 도리어 불치병 환자처럼 보였다.

그분들은 아들이 빨리 건강해져서 서울에 있는 대형교회에 전도사로 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건강이 온전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그의 부모님은 아들 전도사님에게 나와 가깝게 지내지 못하도록 주의를 시키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아들 전도사는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홍예숙 사모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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