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풍경화] 천하제일 건망증 대회

국민일보

[편의점 풍경화] 천하제일 건망증 대회

입력 2019-11-02 04:06

오후 4시. 느닷없이 밀려온 아득한 상실감에 몸이 나른해졌다. 달리기를 하는데 발바닥에 뭐가 붙어 자꾸 달랑거리는 찝찝한 느낌. 우주가 소멸하는 마냥 소중한 무엇이 소르르 사라지는 허전한 느낌. 이 기묘한 감각의 정체는 뭘까. 왜일까. 무엇 때문일까. 그때야 깨달았다. 발주, 발주!

오전 9시50분. 전국 편의점 점주들은 바쁘다. 그 시각이 바로 발주가 끝나는 시간. 신데렐라의 화려한 마차가 호박으로 변하는 것처럼, 그 시각을 넘겨 발주를 빠뜨리면 다음 날 팔 물건이 없다. 편의점에 갔는데 점주가 컴퓨터 모니터에 빨려들 모양으로 고개를 빼죽 내밀고 무슨 일에 열중하고 있다면 앞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시라. 발주 마감시간인가 보군. 데드라인에 쫓길 터이니 꽤나 예민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오전 10시도 아니고, 12시도 아니고, 오후 4시가 되도록 발주를 잊고 있었다. 무언가에 단단히 홀렸던 것이 틀림없다. 그건 마치 아이를 안고 시내버스에 탔다가, 버스에서 내려 너덧 정거장 지났을 즈음에야 “어머나, 우리 아기!” 하고 깨달은 엄마와도 같다. 평소에 하도 뭘 자주 잊고 잃어버려 ‘마이너스의 손’ ‘로스트 메모리즈’ 같은 별명으로 불리는 나이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는 정말 흔치 않다. 7년간 편의점을 운영하며 딱 세 번 겪은 일이다. 어쨌든 방법이 없다. 내일 우리 편의점을 찾는 손님들은 텅 빈 냉장고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김밥, 샌드위치, 주먹밥, 햄버거, 샐러드, 도시락, 아무것도 없는 편의점으로 하루를 버텨야 한다. 동네 창피할 노릇이다.

점주의 건망증뿐인가. 편의점에 분실물이 얼마나 있을까 싶겠지만 소지품을 두고 가는 손님이 의외로 많다. 1위는 단연 신용카드. 결제를 마친 신용카드를 받지 않고 후다닥 뛰어나간다. 뭐가 그리 바쁘신지 빨강 지갑을 두고 간 손님도 있고, 검정 우산을 남기고 간 손님도 있다. 한번은 편의점에 홀로 앉아 있는데 아무도 없는 매장 구석에서 띠리리 띠리리 벨 소리가 울린다. 내 휴대폰 소리가 아닌데? 손님이 물건 고르다 진열대 선반 위에 휴대폰을 놓고 간 것이다. 그렇게 자동차 열쇠를 흘리고 간 손님도 있고, ‘연봉계약서 재중’이라고 적힌 서류를 시식대 위에 보란듯 남기고 간 손님도 있더라. 구입한 상품을 계산대 위에 그대로 놓고 가는 손님 또한 더러 있다. 이러다 지구를 멸망시킬 암호가 담긴 핵가방을 놓고 가거나 125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를 두고 갈 손님도 생기려나.

건망증의 대명사는 봄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편지를 부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주머니에 그대로 있으면 가을”(김대규, ‘가을의 노래’)이라고 어떤 시인은 노래했었지. 생각이 깊어지는 계절, 가을이다. 가을은 시나브로 짙어가고, 단풍이 물들 듯, 우리의 건망증도 깊어간다.

지금 나는 초록 운동화 한 켤레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중이다. 별의별 분실물이 등장하는 편의점이긴 하여도 운동화를 놓고 간 손님은 처음이다. 감색 신발주머니 안에 다소곳이 들어 있던 그 운동화 한 켤레. 아마 운동 마치고 편의점에 들러 이온음료 사는 와중에 놓고 가신 것 같은데, 가시는 걸음걸음 허전했을 그 마음, 사뿐히 즈려밟고 오시옵소서.

그나저나 내일 우리 편의점에선 뭘 팔지? 잔뜩 기대하고 편의점에 왔다가 뚱한 표정으로 돌아갈 손님들의 실망감을 상상하니 송구하기 짝이 없다.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다가 우리 편의점에서 파는 수밖에. 역시 동네 창피할 일이다.

봉달호(작가·편의점주)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