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서초동도 광화문도 싫었던 사람들

국민일보

[태원준 칼럼] 서초동도 광화문도 싫었던 사람들

입력 2019-11-01 04:01

두 광장의 진영 전쟁은 신념의 과잉이 초래한 극단적 소모전이었다
생각의 다름을 조율할 줄 알고 선의의 정책도 불의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제3의 길을 찾아야 한다


뜻밖의 뉴스는 10월 초에 들려왔다. 장관 내정부터 사퇴까지 두 달 넘게 지속된 조국 국면이 8부 능선에 왔을 때였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대표가 대선주자 선호도 3위에 올랐다. 이낙연 국무총리,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뒤를 이었는데 무당층과 청년층에선 두 사람을 앞섰다. 그는 한국이 아닌 독일에 있었고 정치 대신 마라톤을 하고 있었다. 9월 초 이뤄진 직전 조사에선 8위였고 그 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8등이 3등으로 뛰어오른 ‘갑자기 안철수’ 현상은 한 달 사이 등장한 변수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조국 사태로 다시 열린 광장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서초동과 광화문, 두 광장의 함성은 너무도 달랐다.

응답자들은 대선에 두 번 도전하고 독일로 가서 3시간46분에 마라톤을 완주한 그 안철수를 말한 것일까. 여기서 ‘안철수’는 특정인을 뜻하는 고유명사보다 대명사에 더 가깝지 싶다. 2012년 대선에서 친문도 친박도 아니었던, 2017년 대선에서 이 진영도 저 진영도 아니었던, 그래서 지금 서초동에도 광화문에도 없는 정치인의 이름이 그냥 필요했을 것이다. 한국인은 광장에서 싸움을 한다. 독재에 맞서 국민주권을 그곳에서 얻어냈고, 국정농단 권력자를 광장 싸움으로 끌어내렸다. 이번에 목격한 광장은 그런 광장과 형태만 같았다. 거악(巨惡)이 사라진 곳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악이라 규정하며 둘로 갈라져 싸웠다. “다들 진영으로 나뉘어 미쳐버린 것 같다”는 진중권의 생각을 많은 이들이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갑자기 안철수를 불러낸 것일 테다.

신념은 정치인에게 아주 좋은 말이었는데 지금도 그런지 의문이 든다. 서초동과 광화문의 광장 혈투는 신념의 과잉이 빚어낸 소모전이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검찰 개혁을 위해 불공정쯤은 묻어둬도 된다고 외쳤고, 그 길이 틀렸다는 믿음에 기대서 정권을 독재로 규정하며 하야와 탄핵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내 신념과 같으면 편이 되고 다르면 적이 되는 그런 신념이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신념인가. 민주주의를 일궈내려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신념은 한국에 꼭 필요했다. 지역주의를 타파하려는 노무현의 신념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그 모양이었을 게 틀림없다.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힘겨운 숙제를 마쳐서 가치와 욕구가 분화되고 복잡해진 지금, 신념의 정치인보다 서로 다른 신념을 조율할 줄 아는 정치인이 필요해졌다. 서초동도 광화문도 아름답게 보지 않았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문재인정부의 여러 정책이 선의에서 나왔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자의 저녁 있는 삶을 위한 주52시간 정책의 취지가 어떻게 나쁜 것일 수 있겠나. 이런 선의의 시도가 불의한 결과로 이어지는 모습을 우리는 정책마다 목격해야 했다. 최저임금 인상이 최저임금 생활자의 일자리를 빼앗고, 주52시간이 과로 대신 근로 자체를 가로막는 역설적 결과가 일상이 됐다. 세상은 빠르게 바뀌는데 정부의 시선은 과거에 옳았던 가치에 머물러 있다. 옳다고 믿는 바를 좌고우면 않고 추진하는 것은 이제 무능한 일이다. 그것이 여전히 옳은지, 지금 해야 하는지, 부작용은 없는지 열심히 좌고우면하는 정부가 필요해졌다.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진 최저임금 생활자들, 출퇴근이 따로 없는 실리콘밸리와 경쟁하는 기업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조국 사태를 거치며 공정이란 가치가 주목을 받았다. 서울시의 정규직 일괄전환은 공정에도 여러 얼굴이 있음을 보여줬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공정한 사회를 위해 파격을 단행했는데, 감사원은 그 과정에서 특혜성 채용과 채용 기회 박탈의 불공정이 벌어졌음을 발견했다. 임금이라는 ‘결과의 공정’을 이루려 했더니 채용이라는 ‘기회의 공정’이 훼손되고 말았다. 공정의 한 가지 얼굴만 바라본 탓이었다. 이 시대의 공정은 밀어붙여 이뤄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측면을 살펴 다듬어가야 하는 것이다. 공정처럼 명료해 보이는 가치도 이렇게 다층적인 세상에 보수-진보 두 진영의 낡은 잣대를 들이대는 접근법은 어이없게 순진하다. 그것은 거악이 존재하던 시절에나 통했을 내 편, 네 편의 이분법이어서 신념의 과잉을 부르고 역설의 함정에 번번이 빠진다. 두 차례 보수 정권의 실패와 임기 반환점을 맞은 진보 정권의 난맥상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

두 진영에 속하지 않은 정부를 경험하지 못했으니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데, 만약 그것을 중도나 제3지대라 한다면 중도의 가치와 제3의 길은 이런 것일 테다. 소득이자 비용인 최저임금의 양면을 살필 줄 아는 정치, 정책을 작명할 때 선명한 ‘탈원전’ 대신 유연한 ‘친환경에너지’를 택할 줄 아는 정치, 옳다고 믿는 것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앞세우는 정치. 그런 정치를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지지할 준비가 돼 있다. 서초동도 광화문도 싫었던 많은 사람이 아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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