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시동생 신학공부 뒷바라지… 딸 낳고 친정 거제로

국민일보

남편·시동생 신학공부 뒷바라지… 딸 낳고 친정 거제로

홍예숙 사모의 성경적 신유의 은혜 <18>

입력 2019-11-07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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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예숙 사모가 1998년 2월 서울신대 신대원 졸업식에서 오창균 서울 대망교회 목사(오른쪽), 오창호 부산 대망교회 목사(왼쪽)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오창균 목사는 함양반석성결교회 사역 때문에 휴학을 했기 때문에 동생과 같은 해 신대원을 졸업했다.

1995년 결혼 후 남편과 시동생의 신학 공부 뒷바라지가 시작됐다. 서울신대 신대원이 경기도 부천에 있었기 때문에 부천에 허름한 주택을 얻었다. 집을 얻고서도 1주일에 한 번씩 함양 반석성결교회에 가야 했다. 아버지가 목회하시는 교회에 남편과 내가 전도사로 사역했는데 두 사람이 한꺼번에 빠져선 안 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환자들이 너무 많았다. 결혼했다고 해서 환자들이 발길을 끊는 게 아니었다. 두 전도사님의 뒷바라지를 위해선 돈도 필요했다. 아버지가 왕복 차비와 전도사 사례를 책정해 주셨다. 부흥회에 다니면서 조금씩 모아둔 돈이 있었기에 두 사람의 뒷바라지는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 두 전도사님이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남편은 날마다 건강이 좋아졌고 동생 전도사님과의 사이도 좋았다. 부모님이 형제간 우애를 매우 중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댁과는 연락도 없고 교류도 없었다. 그냥 말없이 기도하고 지내야 했다.

명절 때가 가장 고통스러웠다. 남편과 시동생의 얼굴을 보는 내 마음은 몹시 무거웠다. 그러나 교류가 안 된 몇 년의 기간은 하나님께서 작업하시는 기간이었다. 시부모님께 진짜 확고한 믿음이 서게 하셨고 주의 종의 가치를 확실히 알게 하셨다.

몇 개월 후 임신을 했다. 몸이 날로 약해졌는데, 입덧도 심했다. 함양까지 가기엔 아무래도 힘이 부쳤다. 보다 못한 부모님이 결단을 내렸다. 날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그러나 함양 아버지의 교회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나의 빈 공간을 채우시며 환자들에게 안수를 해주셨지만, 기대치가 너무 높았다.

이후 아버지는 경남 거제 옥포의 목사님과 임지를 바꿨다. 나는 거제에 있는 친정으로 아이를 낳기 위해 갔다. 딸을 낳았다. 한 달쯤 몸조리하고 부천에 다시 올라와 보니 집이 너무 좁고 답답했다. 환자들에게 시달릴 때는 최고의 보금자리였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좁았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달렸다.

96년 남편의 논문 학기가 시작됐다. 그때 친정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숙아, 네 남편에게 거제도에 내려와 몇 년 만이라도 장인어른의 목회를 도와주라고 좀 해봐라.” 막내딸을 한 달 동안 데리고 있다가 아무도 없는 부천에 올려보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출산을 하고 한 달 동안 친정에 있으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느꼈다. 딸아이를 낳고 보니 너무 귀엽고 소중했기에 나를 보며 대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남편과 의논해 2년을 도우며 쉼을 얻자고 했다. 마치 휴가를 얻는 기분이었다.

어릴 때 기도원 생활을 시작하고 한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기까지 내 삶 속에 휴식이란 없었다. 거제도에 가면 부모님 그늘 밑에서 푹 쉬어야지 하는 마음에 잠도 이룰 수가 없었다. ‘와, 하나님께서 아기와 동시에 나에게 휴가를 주시나 보다.’ 이제껏 소풍 한번 가보지 못한 나였기에 쉬고 싶었다. 그걸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남편과 함께 짐을 싸서 거제도로 내려갔다. 쉬려고 내려갔기 때문에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이전과는 달리 남편을 앞세워 가는 곳이었다. 과거에 남편은 병든 몸으로 나를 의지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가 목회하시는 교회에 당당하게 전도사로 청빙 받은 것이라 더없이 기뻤다.

남편은 점점 건강해졌다. 친정아버지와 남편은 목회사역에서 호흡이 잘 맞았다. 함양에서 같이 목회한 경험이 있었기에 눈빛만 봐도 서로를 이해하는 듯했다. 일사천리로 사역을 척척 해나갔다.

우리 부부가 내려간 후 교회의 예배와 찬양, 봉사가 더욱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러면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와, 우리 사모님, 시집도 잘 갔지. 어쩌면 저런 전도사님을 만났을까.” 그러나 그런 말이 내게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내 생애에 찾아온 휴가가 너무 귀하고 좋았기 때문이다. 낮잠도 잤다. 음악도 들었다.

그곳은 인산인해를 이루며 집회에 모여든 교인들도 없었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급박한 상황의 환자들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딸아이와 단둘이 작지만 아늑한 공간에 있다는 행복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전도사님의 출근을 돕고 우연히 TV를 켰다. 아마 내 생애에 마음먹고 TV를 틀어 본 일은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대한민국 아줌마들이 TV 연속극을 보며 울고 웃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번 보고 나니 이해가 됐다. 참 재미있었다. 나 역시 대한민국 아줌마로서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에 예수님을 멀리한 시간은 한 번도 없었다. TV를 보면서도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는 철저히 유지했다. 언젠가는 또 해야만 하는 나의 사역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시간 하나님께 감사했다. “하나님, 휴가 주신 것 감사해요. 예쁜 딸 주신 것 감사해요. 좋은 남편 주신 것 감사해요. 예수님 섬기는 부모님 주신 것 감사해요.”

감사의 조건이 많았기에 평안했다. 낮잠도 잤다. 딸아이 젖을 물려가며 방에서 뒹굴어보는 이 행복함이란….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내 생애 최고의 자유였다. 안타깝게도 그 시간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홍예숙 사모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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