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서양 선교사 자복하고 무릎 꿇자 마침내 영성이 바로 섰다

국민일보

[한국기독역사여행] 서양 선교사 자복하고 무릎 꿇자 마침내 영성이 바로 섰다

원산·평양대부흥운동의 시작, 하디 선교사와 강원 김화

입력 2019-11-0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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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령운동의 불길을 지핀 로버트 하디 선교사가 사역했던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지경리(옛 김화군 지경터)의 지경중앙교회 모습. 추수가 끝난 논가에 있는 미자립교회다. 이 일대는 6·25전쟁의 참화로 폐쇄됐다가 1960년대 이후 재건됐다.

강원도 춘천에서 철원군 갈말읍으로 향하는 길은 지금도 험준하다. 화천군 사창리를 지나면 구불구불 이어지는 왕복 2차선 산길이 계속된다. 두류산 복주산 복계산 준령을 지나는데 각기 해발 1000m 안팎이다.

하디 선교사 (1865~1949)

지난달 25일 춘천중앙교회에서 하디(한국명 하리영·1865~1949) 선교사가 눈물의 사역을 했던 옛 지경터교회를 찾아가는 길이였다. 하디 선교사가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해 걸어서 이러한 산길을 지났다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1900년대 조선은 우마차가 고작이었다. 강원도와 같은 두메산골은 복음과 문명으로부터 먼 곳이었다. 강원도 춘천읍(춘천시)에 복음이 들어간 게 1902년이었다.

‘조선남감리교회 30년 기념보’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1930년 9월 서울 종로 YMCA에서 열린 하디 목사 성역 40년 기념 예배 신문 보도 사진.

‘1901년 3월 31일 김화군 지경터(地境垈)에서 하리영 목사가 장년 15인에게 세례식을 거행하고 교회를 조직하니 그것이 강원도에서 선교한 처음의 결과러라.’

앞서 1899년 교통요충지 지경터에 미국 북장로회 웰번(오월번·1866~1928) 선교사가 복음의 물꼬를 대고 있었다. 이보다 앞선 1893년 의료선교사 맥길이 김화 북쪽 개항도시 원산에 시약소 등을 세워 복음을 전했다. 그러다 원산이 미남감리회 선교지역으로 이양되면서 하디 선교사가 원산에 투입된다.

남감리회는 서울~원산 축과 원산~울진 축, 그리고 남감리회 선교의 중심지인 개성에서 춘천을 잇는 전도 길을 개척했다. 김화 지경터(지금의 철원군 갈말읍 지경리 일대)교회는 교통 요지의 특성상 부흥 발전되는 조건을 안고 있었다. 또 미남감리회 조선선교부 창설 주역이자 조선 정치의 명망가 윤치호(1865~1945)가 서울 개성 원산을 축으로 활동했다. 경기도 북부, 황해도 남부, 강원도 북부 일원은 남감리회선교구역이었다. 이로 인해 임진강 고랑포교회와 지경터교회는 남감리회 사역자들의 베이스캠프가 됐다.

1904년 하디 선교사의 보고서 일부.

‘나는 3년 동안 강원도에서 교회가 처음 세워진 지경터에서 어떤 다른 지역보다 애써 일하였으나 그곳에서 선교사역 실패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안겨주었고, 사역을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감을 가져다주었다.’

하디는 강원도 북부가 미남감리회로 이관되면서 웰번의 사역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캐나다 토론토 인근 해밀턴 하디 선교사 생가. 그가 다니던 교회도 남아 있다. 데비 제공

의학도, 지경터교회에서 시험 들다

하디는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으로 토론토의대를 졸업한 의학도였다. 그는 고국에서 미국 부흥설교가 무디(1837~1899)의 영향을 받아 선교사가 될 결심을 했다. 대학 선배 게일의 조선 선교 간증이 조선행 결심의 결정적 이유다. 토론토대학YMCA선교회가 재정 지원했다.

1890년 부산에 도착한 하디는 부산·서울·원산·개성 등에서 의료선교에 전력했으나 정작 순수 사역자가 되길 원했다. 그리고 1899년 미남감리회 소속이 돼 원산을 거점 삼아 강원도 북부 구령에 힘썼다. 그는 원산에서 한국 침례교회 거목 펜윅(1863~1935) 등과 초교파 기도 모임을 하는 등 열정적으로 조선 선교에 힘썼다. 하지만 결과는 ‘말할 수 없는 타격’이었다. 특히 지경터교회 부흥 실패는 사역을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시험 속에 빠뜨렸다.

훗날 ‘철의 삼각지대’로 불리는 평강 김화 철원은 비옥한 땅이나 산세에 둘러싸여 공략이 쉽지 않았다. 6·25전쟁 때 아군이 인민군에 숱하게 희생됐다. 미신과 배타성으로 신앙의 열매 맺기도 쉽지 않았다. 하디가 강퍅한 현장에서 어렵게 세례를 주면 출교하거나 이사해버려 좌절에 빠지곤 했다. 무력함에 자책했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의료선교사라는 전문성도 버리고 오직 말씀 전하는 사역자로만 살겠다고 서원한 그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신앙의 스승 무디처럼 간결한 설교를 통해 불신자가 감화를 받는 능력을 달라며 마룻바닥에 엎드렸다. 조선인들처럼 그는 무릎을 꿇었다. 하디는 자신의 신앙이 교우들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하고 싶었다. 지경터 교우들에게 죄를 자복했다. 서양선교사가 대중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한국부흥운동 불씨의 땅 김화

그럼에도 하디는 의사라는 교만, 동양인에 대한 닫힌 마음,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에 소홀한 영적 폐허를 그들에게 고백했다. “그러자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가운데 놀라운 평화와 기쁨이 다가왔다”고 술회했다. 이 체험이 1903년 무렵이다. 이 기쁨을 원산의 선교사들과 함께 기도회를 통해 나눴고 이 회개 고백이 성령의 불길로 번져 원산부흥운동이 됐다. 또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죄에 매여 살던 한국인에게 회개를 통한 영적 대각성을 가져다준 하나님의 역사가 하디를 통해 성취됐다.

2009년 4월 하디 목사 손자 하디 워너 변호사 내외(위 사진 오른쪽 두 번째와 세 번째)가 지경중앙교회를 방문해 예배당 입구에서 찍은 사진. 아래 사진은 현재의 모습이다. 지경중앙교회 조만철 목사 제공

지금 지경터교회는 흔적이 없다. 일제 말과 6·25전쟁 와중에 시나브로 사라졌다. 지경터, 즉 지금의 지경리는 6·25전쟁 직후 철원군 갈말읍에 편입됐다. 지경리에는 웰번과 하디 선교사 영향으로 뿌리내렸을 것으로 보이는 지경장로교회와 지경중앙감리교회가 선교 사역을 잇고 있다.

하디 선교사는 지경리에서 2㎞ 떨어진 학사리에서도 사역했다. 현 ‘문화이발관’이 새둘막교회가 있던 곳이다.

지경리는 휴전 후 민간인 통제 구역이었다가 1960년 들어서야 민간인 거주가 허용됐다. 이 무렵 미군 군목이 천막을 치고 예배를 봤는데 이것이 발전돼 지경장로교회가 됐을 것이라고 북한교회연구가 유관지 목사가 밝혔다. 유 목사는 지금의 갈말읍 학사리 문화이발관 자리가 지경터교회에 이은 두 번째 교회 즉 새술막(새둘막)교회 자리라고 했다. 전쟁은 이처럼 주보 한 장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무(無)의 상태로 만들었다.

지경장로교회 예배당. 6·25전쟁 직후 미군 군목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유관지 목사 제공

하디는 어린 자식 둘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으며 이 땅에서 45년을 섬겼다. 1930년 10월 ‘한국부흥운동의 아버지 하리영 목사’는 선교 40주년을 기념하는 다화회를 냉동(서울 냉천동 옛 지명) 자택에서 갖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다시 젊엇스면 즐거이 조선으로 나오겟노라.”

약력

·캐나다 토론토의대 졸업 후 1890년 조선에 입국
·협성신학교, 피어선신학교 교수
·기독교서회 총무와 기독신보 사장 역임
·서울 종교·자교·수표교·광희문교회 등에서 담임
·춘천중앙·강릉중앙·양양·삼척·속초·철원제일교회 설립 및 담임

김화=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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