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노희경] ‘상하이의 쉰들러’ 허펑산

국민일보

[빛과 소금-노희경] ‘상하이의 쉰들러’ 허펑산

입력 2019-11-09 04:02

중국 상하이에 유대인 난민 기념관(Shanghai Jewish Refugees Museum)이 있다. 최근 상하이 여행 중에 알게 됐다. 아니,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를 피해 이렇게 먼 상하이까지 건너왔다고? 믿기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그들은 기념관 인근에 게토를 이뤄 살았다.

유대인 기념관은 와이탄, 동방명주 등 멋진 빌딩과 야경을 자랑하는 상하이 중심에서 북쪽 훙커우구에 있다. 티란차오 역사문화관광지역의 옛 건물 복원이 한창인 허름한 건물들 틈에 3층 높이로 회당이 세워져 있었다. 1층은 모세예배당으로 불리는데, 상하이에 있는 두 개의 유대 회당 가운데 한 곳이다. 2, 3층은 상하이 유대인들의 삶과 기념관 설립 배경 등에 대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다. 예배당을 나와 정원에 서면 벽면 가득 동판 위에 새겨진 이름을 볼 수 있다. 상하이로 건너온 1만3732명의 유대인들이라고 한다. 다윗의 별과 함께 유대인의 상징인 모세의 일곱 촛대 방을 지나면 상하이 유대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유대 난민들이 상하이로 이동한 경로, 생존자 영상 인터뷰, 빛바랜 사진들, 소지품 등이 힘겨웠던 당시를 생생히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던 유대인들은 피난처를 찾아나섰지만 그들을 받아주는 나라가 없었다. 상하이저널 자료나 책 ‘루쉰의 사람들’ 등을 보면 중국의 여성 지도자 쑹칭링(宋慶齡)이 상하이 주재 독일총영사관을 찾아가 독일의 인종차별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유대인들이 이탈리아 선박이나 러시아 만주 등 육로를 이용해 상하이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쑹칭링의 부친이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감리교 목회자였다는 걸 아는가. 쑹칭링 역시 미국의 기독교 학교에서 공부했다. 먼 나라 이웃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굳건한 신앙의 힘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오스트리아 빈 주재 중국총영사였던 허펑산(何鳳山)이 본격 유대인의 탈출을 도왔다. 독일에서 유학한 허펑산은 루터교 신자였다.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미리 감지했던 그는 총영사로 부임한 뒤 유대인들에게 상하이행 비자를 무조건 발급해줬다. 서방 국가들이 독일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비자는 물론 유대 어린이 입양조차 꺼리던 시절, 허펑산은 유일한 생명의 통로였다.

그가 발급한 비자만 4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비자를 내주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에도 아랑곳 않고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는 심정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사명을 다했다. 허펑산은 노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 작은 교회를 섬기다 1997년 95세에 눈을 감았다. 유대인을 구출했던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꺼내지 않고 그는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그의 과거는 사후 주변인들의 증언으로 알려졌다. 허펑산의 삶은 선교 뮤지컬 ‘생명의 도장(Stamp of Life)’으로도 제작돼 오는 19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공연된다.

상하이 유대인 난민 기념관에 허펑산 흉상이 세워져 있다. 흉상을 보면서 문득 하나님의 섭리를 떠올렸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절박할 때마다 귀한 손길을 보내어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다. 지도자 모세, 총리 요셉, 왕후 에스더 등이 그랬다.

요즘 중국 내 기독교인들이 처한 상황을 보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최근 순교자의소리, 국제오픈도어 등 선교단체들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중국 정부가 (지하)교회 젊은이들을 핍박하고 있고, CCTV로 예배를 일일이 감시하고 있다. 기독교와 관련 있는 교사나 의료 종사자들의 활동을 금지하고 있다. 산시성의 한 교회 건물이 지난해 폭파됐고, 베이징의 최대 지하교회가 강제 폐쇄되는 등 문 닫는 교회가 잇따르고 있다. 교회 지도자가 구금되고 선교사들이 강제 추방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의 인권단체 차이나에이드는 지난해 구금된 중국 내 기독교인이 1만명에 달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현상으로만 보면 중국은 더이상 복음의 땅으로서 희망이 없어 보인다. 나치 치하의 유대인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허펑산과 쑹칭링이 그 시간에 유대인들의 아픔을 보듬었던 것처럼 지금 중국의 시간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일 거라 믿는다.

중국에서 만난 한 기독교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중국이 외적으로는 어려움 가운데 있으나 내면의 신앙적 뿌리와 흐름이 깊이 자리 잡고 있으니, 우리 중국 교회엔 힘이 있다.” 글로벌 슈퍼 대국에 선교의 문이 다시 열리기를 기도한다.

노희경 미션영상부장 hkroh@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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