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래 끊긴 시부모님과 화해를…” 밤마다 기도

국민일보

“왕래 끊긴 시부모님과 화해를…” 밤마다 기도

홍예숙 사모의 성경적 신유의 은혜 <19>

입력 2019-11-1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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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균 서울 대망교회 목사와 홍예숙 사모가 2015년 8월 강원도 춘천 한 휴양지에서 세 딸과 함께했다.

1996년 첫 아이 출산 후 경남 거제에서 시작된 특별 휴가 기간은 길지 않았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환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끝이 났다. 또다시 안수기도가 시작됐다.

거제 새옥포성결교회 담임목사님이셨던 아버지가 흔쾌히 허락하신 일이었기에 성경적 치유사역이 교회 안에서 점점 중요한 사역으로 자리 잡았다. 각종 병명의 환자들이 몰려오자 교인들은 놀라워하며 신기해 했다. 전국에서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왔다.

“아니, 이 작은 우리교회에도 외국인이 오다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집사님도 있었다. 교회는 부친 목사님의 힘 있는 설교, 성령 충만한 남편 전도사님의 찬양, 나의 안수사역, 그리고 최선을 다해 부르짖는 교인들의 기도가 하나 돼 어우러졌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내게 들려오는 기분 좋은 말이 있었다. “사모님, 시집 잘 갔네!” 거제에 처음 와서 3개월 동안 들었던 말인데, 다시 주의 일을 하다 보니 그때까지 들었던 말과는 정반대의 말이 내 귀에 들려왔다. “전도사님, 장가 잘 갔네!”

어렵게 수소문해서 찾아오는 환자들은 대부분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다. 하나님께선 내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치료가 안 될 환자에게는 손 얹어 안수하지 말라는 음성을 미리 주셨다. “예수 이름으로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시면 어떤 심각한 상태의 환자도 하나님께서 고쳐주셨다.

분주하게 안수사역을 하는 동안 둘째 아이가 생겼다. 입덧이 심했다. 안수시간을 반으로 줄였다. 대신 어머니께서 나머지를 감당했다. 꼭 내가 돌봐야 할 환자는 한 번씩 봐 줬다. 교회는 계속 소문에 소문이 났다. 예수 이름을 전하며 그 능력이 나타나는 좋은 교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살아 역사하시는 교회로 성장을 거듭했다.

98년 둘째 딸을 낳았다. 그러나 큰 아이 때보다는 몸조리를 잘할 수 없었다. 찾아오는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틈틈이 기도하고 말씀 보는 시간도 가졌다. 아내로서, 딸로서, 엄마로서의 삶도 바쁘게 살았다. 그래도 이곳저곳 부흥회를 다니는 것보다는 나았다.

우리 가정이 거제도에 내려오고 얼마 후 시동생도 통영의 태평성결교회 부교역자로 내려왔다. 형 가정과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부모님과 단절된 터라 매주 우리 집에 와서 대화도 하고 쉼도 얻고 조카들과 놀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만들어 주는 일주일 분의 국과 반찬을 가져갔다.

내가 시동생을 잘 대해 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내게 잘했기 때문이 아니요, 남편의 하나밖에 없는 총각 동생이었기 때문도 아니요, 주의 길을 가는 주님의 귀한 종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섬겼다.

큰딸과 작은딸을 키우는 재미도 쏠쏠했다. 둘 다 야무지고 똘똘하게 커 줬다. 유치원도 갔다. 온 교회 성도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정도로 예쁘게 잘 컸다. 담임목사님이셨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누구보다 더 예뻐하셨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늘 경남 함양에 계시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가 기도 제목이었다. 밤이면 모든 일과를 마치고 작은 방에 건너가 무릎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다. “하나님, 5계명의 축복을 받게 하옵소서.” 주께서 허락하셔야 하는 일이었다.

기도하며 남편과 시동생을 몇 차례 시부모님이 계시는 함양에 다녀오게 했다. 큰 아이를 딸려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시부모님의 마음은 좀처럼 풀리지 않으셨다. 남편은 내게 그만하면 됐다고 오히려 위로해줬다. 그런 와중에도 환자 보는 일과 기도하는 일은 계속됐다. 시부모님과의 문제 외에는 모든 문제가 잘 풀려나가는 은혜로운 나날이였다.

2000년 셋째를 임신했다. 그 무렵 그렇게 완고하시던 시부모님께서 좋은 학벌을 뒤로하고 사명자의 길에 들어선 아들들을 받아들였다. 물론 나도 며느리로 받아주셨다. 온 가족이 하나 돼 시부모님을 뵈러 갔다. 우리에게 휴가를 내어 보내주신 담임목사님이셨던 친정아버지와 친정어머니, 내 눈에는 누구보다 기뻐하시는 두 분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님의 넓은 사랑에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만남이 이뤄지고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시댁에서 시간을 보냈다. 시부모님께서는 언제 우리가 어려운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자연스럽게 감싸주셨다. 부모님은 깊은 사랑을 베풀어주셨다. 손녀들을 부둥켜안고 기뻐하시는 그 모습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헤어져 있는 몇 년의 기간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시부모님의 믿음도 견고하게 세워져 있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만약 우리의 결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면 서울대를 졸업한 자식들에 대한 기대가 여전히 큰 부모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남편과 시동생을 편하게 해 주시기 위해 잠시 광야 생활을 허락해 주셨다.

시댁이 너무 편했다. 마치 거센 폭풍이 밤새 몰아치다 아침이 되자 조용하게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시댁의 장로님과 권사님은 하나님의 귀한 종인 두 아들과 손녀들을 자랑하고 감사하며 치유사역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시는 강력한 기도의 후원자가 됐다.

양가 부모님의 기도에 힘입어 2001년 셋째가 태어났다. 또 딸이었다. 모두가 기뻐했다. 세 딸은 예쁘고 똘똘하게 자라났다.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열심히 주의 일을 감당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최고의 선물을 주신 것이다.

홍예숙 사모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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