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천지우] 알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국민일보

[뉴스룸에서-천지우] 알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입력 2019-11-18 04:03

국내 방송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언급할 때 총리 직함을 빼고 ‘아베’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일 관계가 나빠지면서 이런 경향이 생긴 듯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반대의 경우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그냥 ‘김정은’이라고 할 때가 많았는데, 한반도 화해 무드가 조성된 지난해부터 위원장 직함이 꼭 붙게 됐다.

최근 KBS 프로그램에 패널로 나온 산케이신문 기자가 문재인 대통령을 ‘문재인씨’라고 부른 것이 문제가 됐다. 시청자 항의가 잇따라 결국 제작진이 사과했다. 듣기 싫은 얘기를 하는 일본인이 우리 대통령을 낮춰 부르기까지 하니 많이들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직함에다 ‘씨’까지 빼서 하대하면서 일본인의 ‘문재인씨’ 호칭에 펄펄 뛰는 것은 좀 편협하지 않나.

요즘 많은 사람들은 어떤 현상이나 이슈를 판단할 때 이 얘기, 저 얘기 다 들어보고 찬찬히 생각하는 과정을 생략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안에 붙어 있기 마련인 복잡한 맥락을 따져보려 하지 않는다. 불편한 사실은 듣지 않고, 진위와 상관없이 마음에 드는 이야기만 취한다. 딱 봐서 기분이 나쁘면 저건 나쁜 것이고,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문제없다고 하면 문제없는 거라고 믿는다.

바둑을 둘 때 자세한 수읽기를 하지 않는 상태에서 떠오른 첫 느낌을 ‘제일감(第一感)’이라 한다. 물론 제일감으로 둘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착수에 앞서 신중하게 수읽기를 하지 않으면 대국을 이기기 어렵다. 바둑에서도 이럴진대 세상살이에서 제일감에만 의존한다면 당연히 곤란해지지 않을까.

느낌과 기분에 따라 사안을 판단해버리는 경향을 ‘반지성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씨는 저서 ‘타락한 저항’에서 반지성주의를 ‘알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로 규정했다. 이를테면 자신이 혐오하는 대상을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혐오를 총동원해 그 대상을 규정하려 드는 것이 반지성적 행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에서 답답한 부분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지식인으로 이름난 사람들이 ‘조국 수호’를 부르짖는 게 특히 이해가 안 됐다. “검찰이 개혁을 안 당하려고 감히 대통령의 인사권에 도전했다”며 검찰을 규탄하는 것까지는 이해되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흠집투성이인 조 전 장관의 흠집 자체를 부정하거나 모른 체하며 그를 두둔하는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또는 정권)에게 불리한 사실을 모르려고 애쓰는 반지성적 행태다. 지식인이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더 이상 지식인이 아니다. 대중을 오도하는 나쁜 선동가일 뿐이다.

우치다 다쓰루 고베여학원대 명예교수는 ‘반지성주의자들의 초상’이란 글에서 19세기 말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에두아르 드뤼몽을 최악의 반지성주의 사례로 들었다. 드뤼몽은 ‘유대인의 프랑스’란 책에서 “프랑스 혁명 후 100년 동안 가장 이익을 본 집단은 유대인이므로 프랑스 혁명을 계획하고 실행했던 자는 유대인”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 황당한 내용의 책은 당시 최대 베스트셀러가 됐다. 수많은 독자가 드뤼몽에게 팬레터를 보내 “이 책을 읽고 속에 얹혔던 것이 쑥 내려갔습니다” “복잡하던 머릿속이 단번에 개운해졌습니다” “이제까지 몰랐던 모든 것이 훤히 들여다보였습니다”라고 예찬했다고 한다. 이건 요즘 SNS에서도 자주 보이는 문장이다. 어느 유명인사가 현안을 통찰하거나 일침을 가하는 글을 올리면 “이걸 읽으니 모든 상황이 싹 정리됐어요!”라는 식으로 찬양하는 댓글이 주욱 달린다. 유명인사의 글이 정말로 반짝이는 통찰을 담았다면 자연스러운 반응이겠지만, 드뤼몽 식의 글에 대한 환호라면 끔찍하고 절망적인 장면이다.

사람들은 어렵고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고 싶지만, 지난한 사유 과정과 애매모호한 설명을 싫어하고 누군가가 명쾌하게 한마디로 설명해주기를 바란다. 말 한 마디, 글 한 줄 읽었다고 복잡한 문제가 단박에 풀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잘 없다.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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