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 칼럼] 실손보험 간소화法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국민일보

[박정태 칼럼] 실손보험 간소화法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입력 2019-11-27 04:01

3800만 가입자 번거롭고 불편하게 하는 제도가 10년째 지속
국회 정무위원회는 관련법안 논의조차 안 해 무산 위기
소비자들이 ‘낙선’ 경고장 날려 법안 심사토록 유도해야


지난주 수요일 병원 순례에 나섰다. 매년 1월 연말정산이 끝나면 국세청의 가족 의료비 내역 자료를 토대로 2, 3월쯤 하는 연례행사였으나 올해는 게으름을 피우며 미루다 11월이 됐다. 대상은 병의원 5곳과 약국 3곳. 가족을 대신해 준비 서류를 챙긴 뒤 오후 3시 집에서 출발했다. 매년 해본 일이라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첫 도착지인 종합병원에서부터 꼬이고 말았다.

내 신분증, 가족 신분증,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시하고 처방전이나 진료차트를 발급해달라고 했는데 당사자 동의서를 갖고 와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코, 작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기억을 되살려 보니 작년엔 큰 병원이 아닌 동네 작은 병원을 돌며 진료비 계산서를 뗐기에 가능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단서 발급을 물어보니 그건 오직 본인만 신청 가능하다고 한다. 발급 비용도 2만원이란다.

종합병원을 나와 2차 목적지인 전문병원에 바로 전화를 걸었다. 동의서가 필요하다는 답은 매한가지였다. 그곳은 포기하고 동네 내과의원으로 향했다. 오후 4시가 넘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수요일 진료가 오후 4시까지로 변경됐다는 안내문이 꽉 닫힌 정문 앞에 붙어 있었다. 나머지 의원 2곳(약국 2곳)에 들러 소액의 의료비 계산서만 받아들고 패잔병처럼 귀가했다. 모두 2시간 넘게 걸렸다. 서류가 구비된 2곳의 통원의료비만 온라인을 통해 보험사에 청구했다. 한숨만 나왔다.

실손의료보험 청구 체험기다. 당사자가 신분증만 갖고 직접 갔으면 퇴짜를 맞지 않았을 것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내 경우는 차치하고 대리인이 가야 할 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서류 발급과 절차, 온라인·오프라인 청구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 상당수와 거동이 불편한 중증환자 등이 거기에 해당할 게다. 필요 서류도 의료비 금액에 따라 다르다. 액수가 크면 보험사가 추가 증빙 서류를 요구할 수도 있다. 번거롭고, 복잡하고, 시간 소모 많고, 어떨 때는 발급 비용도 들고…. 정보기술(IT) 강국인 대한민국에서 불합리한 제도다.

실손보험 가입자는 3800만명(올 6월 기준)에 달한다. 국민 4명 중 3명꼴이다. 국민건강보험이 보장하지 않는 의료비를 지급하는 보험이라서 제2의 건강보험으로 불리는데 국민 편익과는 거리가 멀다. 가입자가 각종 서류를 준비해 보험사에 팩스·우편·홈페이지·모바일 등을 통해 청구해야 하므로 불편하고 귀찮다. 의료비가 소액이면 포기하는 사례가 많을 수밖에 없다. 입원의 경우 4.1%, 외래의 경우 14.6%, 약 처방의 경우 20.5%가 청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청구 이유로는 90.6%가 소액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지난해 7월 보험연구원 보험소비자 면접조사 결과).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더불어민주당 고용진·전재수 의원이 각각 대표발의한 게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법안이다. 가입자가 의료비 증빙 서류를 보험사에 보내달라고 요청하면 병원이 전자문서 형태로 전송하는 내용의 보험업법 개정안이다. 의료기관이 보험사에 서류를 보낼 때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또는 전문중계기관을 거치도록 했다. 금융위원회도 신중 검토에서 찬성으로 입장을 바꿨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오래전에 제도 개선을 권고했다.

한데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가 안건 순번을 뒤로 미루며 지난달 24일에 이어 지난 21, 25일에도 법안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 보험업계와 소비자단체들이 환영하고 있으나 의료계가 결사반대여서 국회가 미적대는 게 아니냐는 질책이 나온다. 의료계는 개인 의료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며, 보험사가 환자 정보를 쉽게 획득해 신규 보험 가입이나 계약 갱신을 거부하는 데 악용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존에 떼어주던 종이문서를 전자문서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실상은 의료계 수입원인 비급여 과잉진료가 드러날 걸 우려하기 때문이라는 소비자단체의 지적이 일리 있다. 일부 대형병원이 보험사와 개별적으로 연결해 무인단말기나 병원 애플리케이션으로 피보험자의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는 시범 사업에 잇달아 동참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반갑다. 25일엔 서울성모병원이 실손보험 전자청구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게 시대적 흐름이다.

이거야말로 민생법안인데 국회에 가로막혀 법제화가 무산될 지경에 처했다. 국민 권익을 외면한 국회의 직무유기다. 10년간 표류해온 법안이 또다시 물거품되는 걸 그대로 지켜볼 순 없다. 20대 국회에서 폐기되면 부지하세월이다. 주권을 침해당한 소비자들이 들고 일어나야 한다. 정기국회에서 처리가 안 되면 12월 또는 내년 임시국회를 소집해 법안을 심사하도록 만들어야겠다. 목소리 큰 의료계 눈치만 보고 3800만 국민을 경시하는 정치권에 강력한 경고장도 날려야 한다. 법안에 침묵하거나 반대한 정무위 소속 의원들에 대해 내년 4월 총선에서 낙선운동을 펼치겠다고 말이다. 총선 때까지 놀고먹겠다는 요량이 아니라면 국회는 응답해야 한다.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