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칼럼] 죄수의 딜레마가 시작됐다

국민일보

[김명호 칼럼] 죄수의 딜레마가 시작됐다

입력 2019-12-02 04:01

자기 이익을 위한 범행 자백이 나쁜 결과로 이어지는 죄수의 딜레마는
상대에 대한 신뢰가 없어 배신하기 때문에 발생
음습한 권력 행적이 드러나는 건 정권 신뢰를 상실케 한 조국 사태에서 기인…
정권 실세들이 권력을 너무 가볍고 무능하게 다룬 탓 아닌가


범죄를 공모해 실행한 두 사람이 잡혔다. 객관적 증거는 충분치 않다. 입증하려면 자백이 필요하다. 수사관은 두 범인을 분리 심문하면서 똑같은 선택지를 준다. ①A가 자백하고 B가 침묵(또는 부인)할 경우 A는 무죄, B는 징역 10년 ②둘 다 자백하면 징역 5년씩 ③둘 다 침묵하면 징역 1년씩. 게임 이론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이다. A 입장에서 B의 침묵이 예상되면 자백이 유리하다(1년이 아닌 무죄이므로). B가 자백이 예상돼도 자백이 유리하다(10년 아닌 5년이므로). A는 어떤 경우든 자백이 이익이다. B도 똑같다. 가장 이익에 부합하는 개인의 합리적 선택(자백)이지만 결국엔 둘 다 자백으로 징역 1년보다 나쁜 결과로 나온다.

사회과학 특히 갈등과 해결, 협상 과정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는 죄수의 딜레마 이론에서 A, B가 의사소통 할 수 있고 협력적 관계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서로 말 맞추면 되니까. 그런데 상황은 통제(분리 심문)된다. 자백은 자기 이익의 극대화이자 상대방에 대한 ‘배신’ 또는 ‘변절’이다. 두 사람이 더 좋은 결과를 위해 배신을 선택하고, 협력을 약속했더라도 더 좋은 결과(무죄)를 위해 배신할 동기를 갖게 된다. 신뢰와 배신의 문제, 이게 죄수의 딜레마의 핵심이다. 위기 시 각자도생이라고나 할까.

정권 3년 차, 권력 음습한 곳곳에서 펼쳐졌을지도 모를 일들이 슬슬 불거져 나온다. 지금 드러난 게 사실일 수도, 빙산의 일각일 수도, 과장됐을 수도,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것일 수도 있겠다. 진실은 아침마다 조금씩 밝혀질 것이고, 누군가 퍼다 나르는 가짜뉴스는 조금씩 배척될 게다.

김기현 전 울산시장(자유한국당)에 대한 청와대 하명 수사 의혹과 관련해 범죄 첩보의 생산과 이첩, 이후 상황을 놓고 관련자들의 말이 엇갈린다. 정치적 이해를 달리하는 이들끼리는 사건을 보는 관점 자체가 다르니 말이 다를 수 있다. 흥미로운 건 여권 내부의 진술이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백원우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은 지난 28일 입장문을 통해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라는 표현으로 단순 첩보였음을 강조하고 “단순 이첩 후 처리와 후속 조치를 보고받은 바조차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은 29일 국회 운영위에서 “압수수색 전 한 번 보고받았고, 압수수색 20분 전에 압수수색을 보고받았다”고 답변했다. 검찰 출신인 박형철 청와대 반부패비서관은 첩보를 백원우로부터 받았다고 검찰에 진술했고, 경찰은 청와대에 10여 차례 보고했다고 한다. 왜 수사 진척이 안 되느냐는 백원우의 질책이 있었다는 보도도 있다. 말이 엇갈리는 건 당사자나 그 조직이 이익을 다투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첩보의 생산 과정, 가공 여부, 이첩 원본 내용, 청와대 개입 수준, 검찰 공격의 선봉장이자 총선 출마 의지가 강한 당시 경찰 수사 책임자의 수사 추진 과정, 이미 드러난 오래전 상황을 지금에야 검찰이 다시 꺼내든 배경…. 수사가 진행될수록 관련 당사자, 청와대, 검찰, 경찰의 진술과 입장이 점점 더 벌어질 게다. 서로간 신뢰가 없으니 모두 죄수의 딜레마에 빠졌다.

구속된 유재수 전 부산시 부시장에 대한 감찰 무마 의혹도 마찬가지다. 관계나 정치권에서 알 만한 이들에겐 당시부터 소문이 돌았다. 백원우 등 청와대는 경미한 사안이라 했고, 그걸 받아 금융위원회는 군소리 없이 사표만 받았다. 그런데 박형철은 수사해야 할 사안이라고 했었다. 이미 서로의 진술은 달라지고 있다. 별일 아니라고 결정했다는 조국, 백원우, 박형철 3인 회의 내용도 앞으론 서로 책임 떠넘기기 식으로 말이 달라질 게다. 당시 어떤 방식의 무마 노력이 있었는지, 백원우 등 여권 실세들이 무슨 작용을 했는지, 유 전 부시장 카톡방에서 무슨 증거가 나왔는지, 당시 감찰 결과가 영장의 주요 내용이었을 정도로 이미 드러난 사안이었는데 검찰은 왜 지금에서야 물 위로 끌어올렸는지…. 역시 죄수의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 좀 있으면 정치 권력과 검·경 권력 뒷면의 추악한 면을 볼 수도 있겠다. 권력을 이용해 상대방 죽이고 우리 편 살리며, 배신과 이용·역공작의 코드가 곳곳에 배어 있을 테다. 배신과 음모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정권 말기도 아닌데 권력의 추악한 면이 드러날 조짐을 보이는 건 조국 사태 이후다. 조국 사태는 정의와 공정을 외쳤건만 돌아가는 꼴이 그게 아니란 걸 결정적으로 말해줬다. 여기저기서 내부고발을 하는 딥 스로트들이 나타날 게다. 정권에 신뢰가 없어진 탓이다.

여권은 권력을 너무 가벼이 다뤘다. 그 가벼움은 그네들이 그렇게 비난했던 그 모습을 그대로 재생할 것 같다. 그 가벼움은 적폐청산을 복수극으로 만들고, 자신들이 그렇게 타도 대상으로 손가락질했던 극우 세력의 복원을 도와준다. 그 세력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해 생존하려는 고도의 전술 아닌 바에야, 어찌 이리도 권력을 가볍고 무능하게 다뤘을까.

김명호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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