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이계안] 뱀뱀이 없는 놈

국민일보

[경제시평-이계안] 뱀뱀이 없는 놈

입력 2019-12-03 04:03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熹)는 순우리말의 보고라고 높이 평가를 받는 그의 걸작 소설 ‘임꺽정’에서 뱀을 뱀이라 콕 집어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을 ‘뱀뱀이 없는 놈’이라 했다.

2019년 11월 22일 오후 6시, 대한민국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 통보’의 ‘효력 정지’를 발표했다. 지소미아 종료 통보의 발효를 불과 6시간 남겨둔 시점이었다. 동시에 반도체 핵심소재 3종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응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절차의 일시 중단도 발표했다. 물론 일본이 수출 규제를 재검토하기로 하는 조건이다.

그간의 상황을 시간 순서로 되짚어보자. 먼저 2018년 10월 대한민국 대법원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명령을 판결했다. 이에 대응하여 일본은 2019년 7월 4일 고순도 불화수소, 포토 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3종의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제조용 필수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를 단행했다. 이어서 8월 2일에는 대한민국을 백색국가 리스트에서 제외했다. ‘대한민국의 전략물자 밀반출과 대북제재 위반 의혹, 수출국으로서의 관리책임 미흡’ 등을 운운하며 대법원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가 아니라 국가안보상의 이유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에 대한 상응 조치로 대한민국도 역시 안보적 명분을 내세워 지소미아의 종료를 통보했다.

한동안 양국 관계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을 것처럼 ‘강 대 강’으로 맞붙어서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던 형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지소미아 종료 통보의 발효를 불과 6시간 앞두고 종료 통보의 효력을 정지시킨 것은 의외로 비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간 지소미아의 당사자로서 막전막후에서 치열하게 싸운 대한민국과 일본은 물론, 비록 형식적으로는 지소미아의 제3자라고 하나 사실상 최대 이해관계자인 미국을 포함한 3자 간에 어떤 이야기가, 어떤 공방이 오갔는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문득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羅生門)’이 떠오른다. 일본의 영화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을 듣는 일본의 구로사와 감독이 1950년에 제작했고, 51년 베니스 영화제 대상 수상작이다(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알려진 영화 ‘가케무샤(影武士)’로 80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도 수상했다).

라쇼몽은 아내와 함께 길을 가던 한 사무라이의 죽음을 놓고 그와 싸운 산적, 당사자 사무라이, 둘 사이의 싸움의 발단이 된 사무라이의 아내의 진술이 서로 사뭇 달라 사리 판단이 어렵다. 거기에 더하여 숲에서 그 싸움을 엿본 나무꾼의 진술까지 엉켜 ‘진실이 무엇인지’, 도대체 ‘진실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라는 사뭇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그동안의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공방은 그 싸움을 엿본 미국까지 더해져 라쇼몽과 다를 바 없는 구도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2019년 11월 22일 오후 6시 지소미아 종료 통지의 효력 정지를 발표할 때까지 이를 둘러싼 대한민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 간에 벌어졌던 일의 진실은 무엇인가, 과연 진실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그중에서도 첫째 대한민국의 지소미아 종료 통보 효력 정지와 일본의 수출 규제 재검토가 서로 상응하는 것인가. 둘째 일본의 수출 규제와 백색국가 명단 제외 결정이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국가안보상의 이유일 뿐 대법원의 판결과 전혀 무관한 것인가.

셋째 비록 형식적으로 제3자라고 하지만 사실상 지소미아의 최대 이해관계자인 미국은 이 과정에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가. 특히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의 대폭적인 인상 요구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그 진실을 알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필자만이 뱀을 콕 집어 뱀이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뱀뱀이 없는 놈’인가?

이계안 2.1지속가능재단 설립자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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