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최연하] 사진을 보는 시간

국민일보

[청사초롱-최연하] 사진을 보는 시간

입력 2019-12-04 04:02

모든 예술작품 감상이 비슷한 경험을 선사하듯 사진을 찍고 보는 일은 각자의 바람에 이르는 역동적인 운동이다. 간직하고 싶고, 보고 싶은 대상이 찍힌 사진을 볼 때마다 존재의 주름이 긴장된다.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보며 계속 눈을 맞추고, 가보고 싶고, 살고 싶게 하는 풍경사진 앞에서 오래 머물게 된다.

‘풍경(風景)’이라는 단어를 살피면서 그 뜻의 오묘함에 새삼 놀란다. ‘바람이 만들어낸 경관, 바람과 햇볕, 그리고 그림자의 풍경’이라는 뜻을 찾을 수 있는데, 곱씹어보니 바람과 햇볕과 그림자의 표상이 풍경이었다. 아름다운 말이다. 사람풍경, 도시풍경, 자연풍경 등 내게 모든 사진은 ‘어떤 풍경’을 표상한 것이다. 사진은 3차원의 실체를 2차원으로 본뜨는 것인데, 보이지 않는 바람부터 대상의 밝고 어두운 세부까지 재현해야 좋은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을 찍는다는 의미를 가진 촬영(撮影)에도 ‘그림자를 붙잡는다. 그림자를 찍는다’라는 뜻이 있다. 요컨대 ‘풍경을 촬영하는 일’은 어둠에 노출과 초점을 맞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바람들을 붙잡는 것이다. 사물과 풍경의 그림자를 붙잡고(촬영·撮影), 그림자로 맺혀 있던 상을 나타나게 하고(현상·現像), 드러난 상을 영원히 각인하는 것(인화·印畵). 즉 촬영과 현상과 인화의 과정은 부재로서 비로소 현존하는, 사진이 흔적의 예술임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여정이다. 사진이 실재를 각인(刻印)한 기억의 마중물로 흔히 언급되는 이유일 것이다.

사진이 처음 세상에 나올 때, 당연히 ‘포토그라피(photography)’라는 이름을 얻기 전에, 사진발명가들이 붙잡을 수 없는(정착시킬 수 없었던) 이 ‘떠도는 이미지’를 향한 열망들을 살펴보면 참 애틋하고 창연하다. 그들은 사진을 묘사하기를, ‘자연경관을 복사하는 것, 충실한 자연의 형상, 자연의 효과, 뭔가의 흔적이 남겨진 그림이자 소묘’라고 말한다. ‘뭔가의 흔적’이 사진이라는 정의가 특별히 와 닿는다. 흔적은 보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 있는 듯 없는 것이기에 보려 하지 않으면 쉬 사라지는 것이다. 당연히 가시화가 어렵다. 하지만 많은 사진가들이 흔적을 붙잡고 싶어 한다. 흔적 중에 최고의 힘을 발휘하는 것은 기억이었다.

기억을 선명하고 강렬하게 불러오기 위해, 특히 아름다운 사랑의 순간이나 유년의 찬란했던 빛들을 다시 모아 현재를 환하게 비추기 위해 사진이 탄생한 것은 아닐까. 잠재되어 있었던 온갖 가능성을 일깨우고, 점점 사라져가는 희미한 사람들과 흐릿한 풍경을 새롭게 감각하기 위해 아마도 사진이 필요했을 것이다. 기억의 창고인 사진 속에서 우리가 염원했던 희망과 약속을 발견하고, 지금이 그 약속에 응답해야만 할 시간임을 통찰하는 사람들에게 사진은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베르나르 포콩에게 사진은 시간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정박지였다. 무형의 기억을 담아내는 데 사진만큼 안전한 저장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슐라르의 말처럼 기억은 단순히 추억의 골동품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기 때문에 그 가치가 새롭게 부각되는 차원이라고 했을 때, 기억을 재생하는 장치로 카메라와 사진은 복잡 다변하는 현대인들의 일상에 위로와 안식의 처소임이 분명하다.

좋은 사진을 보는 일은 어쩌면 내 안의 흔적을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바람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내 바깥의 바람을 바라보게 하듯이, 사진이 내 안에서 다시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경험. 사진을 촬영할 때 ‘어둠’의 디테일을 살리면 전반적으로 계조가 풍부한 사진이 되는데, 사진 촬영뿐만 아니라 사진 보기의 경험은 어떤 어둠들을 읽어내고 기쁨을 깨워내고 바람들을 무성하게 하는 일이다. 생의 아름답고 귀한 순간들을 정지시킨 후 다시 복원하여 사진으로 살려내고 기억의 자리에 불을 밝히는 것, 포콩의 말처럼 ‘어린 시절의 성탄절같이, 사라지지 않는 기쁨의 사과같이’ 사진 속에서 빛나는 시간은 여전히 가능한 현재이다.

최연하 사진평론가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