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의 수렁에서 탈출한 여성의 외침

국민일보

성매매의 수렁에서 탈출한 여성의 외침

[책과 길]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봄날 지음, 반비, 428쪽, 1만8000원

입력 2019-12-07 04:06
서울의 한 성매매 집결지를 촬영한 사진이다.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을 펴낸 저자 봄날 역시 저런 곳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업주는 자기 말만 잘 들으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했지만, 어떻게 하면 집도 차도 살 수 있는지, 돈은 어떻게 하면 버는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 뉴시스

으레 저자 소개가 담기는 책날개엔 글쓴이의 본명 고향 나이 학력이 담기기 마련인데 이 책은 다르다. 필명인 ‘봄날’이라는 글자, 그리고 저자의 신산했던 삶을 개괄한 내용만이 짤막하게 적혀 있다. 그런데 저자는 왜 봄날이라는 필명을 내세웠을까. 전화를 걸어 물었을 때 저자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나를 위해서 울어주는 사람이 생겼거든요. 이런 관심과 사랑, 지원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사는 게 참 따뜻하게 느껴지면서 내 삶에도 봄이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봄날’이라고 지었어요.”

저자가 말한 “나를 위해서 울어주는 사람”은 여성인권지원센터를 가리킨다. 20년 넘게 이런저런 성매매 업소를 전전한 그는 센터를 통해 성매매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은 저자의 굴곡진 인생 스토리를 통해 한국 사회 가장자리에 놓인 성매매 여성의 삶을 들려주는 용감한 책이다. 성매매 여성에게 쏟아지는 조롱과 멸시가 책에도 쏟아질 수 있지만 수화기 너머 저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비난이 두렵진 않아요. 세상엔 나쁜 사람도 있지만 좋은 사람도 많거든요. 저는 아직 세상이 살 만한 곳이라고 믿어요.”

그녀는 왜 책을 썼을까

저자는 첫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책을 쓰게 된 주된 이유는 빈곤하고 자원이 없는 여성인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 폭력이 가해졌는지, 그 폭력이 어떻게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실제로 ‘길 하나…’을 읽으면 저자의 말이 어떤 뜻인지 가늠하게 된다.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사는 ‘울다’이다. 그는 울고 또 운다.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며 살았던 건 저자에게 진심으로 곁을 내주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저자는 ‘봄날’을 마주하기까지 끝 모를 자학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의 인생 역정을 간추리자면 이렇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다. 중학교 과정도 마칠 수 없었다. 봉제 공장에 취업해 ‘공순이’의 삶을 살았다. 10시간 넘게 일하고 야근까지 해도 월급은 10만원을 넘기지 못했다. 열여섯 살에 공장 통근버스 기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고, 이듬해엔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져 임신중절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친구가 아르바이트한다는 가라오케에 갔다. 남자들은 팁이라면서 몇만원씩 쥐여주었다. 업주는 미성년자인 그를 달콤한 말로 꼬드겼다. “눈만 질끈 감으면 집도 사고 차도 사. 여기서 일하는 언니들은 돈 벌어서 가게도 차리고 얼마나 잘사는지 몰라.”

저자는 “가족이 좀 더 잘살았으면 하는 마음, 커가는 동생이 나보다는 부족함 없이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공장을 그만두고 업소에 들어갔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성매매 여성들을 다룬 기사에서 흔히 보던 내용이다. 업주한테서 미리 받은 선불금은 빚의 올가미였다. 업주들은 옷 화장품 신발을 사는 비용까지 저자한테 떠넘겼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었다. 지옥의 여정은 룸살롱으로 이어졌다. 룸살롱의 경우 한 업소에서 오래 일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남자들의 지명이 많아도 새로운 아가씨들이 들어오면 지명을 빼앗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룸살롱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해야 했다. 급기야 제주도까지 내려갔다.

성매매 여성이 처한 참혹한 현실을 드러낸 작품이니 한없이 독자를 까라지게 만드는 이야기가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저자가 걸어가야 했던 절망의 터널은 성매매 집결지로, 보도방으로, 티켓다방으로 이어졌다.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불법 장기매매 스티커에 적혀 있던 번호로 전화를 건 적도 있었다. “팔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전부 팔아서라도 벗어나고 싶을” 정도로 절박해서였다. 그에게 희망은 허깨비 같았다. 룸살롱 업주들은 지각비나 결근비라는 명목으로 자주 벌금을 물렸고, 집결지 업주는 생리할 땐 솜을 넣고 일하라고 했다. 티켓다방 업주는 다이어트약을 먹이면서 강제로 다이어트를 시켰다. 다방에서 일할 때는 자식이 둘 있는 남자와 살림을 차렸는데 이때의 삶도 끔찍하긴 매한가지였다. 살뜰하던 남자는 술에 취하면 저자의 ‘과거’를 들먹이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내가 20여년간 경험한 성매매 업소는 나를 때린 아버지와 어린 나를 성추행했던 삼촌과 나를 강간하며 웃던 그놈, 임신한 나를 버리고 간 군인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모두가 안전한 세상을 원한다”

여성인권지원센터를 통해 파산신청을 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삶은 녹록지 않았다. 저자가 업소로 돌아갈까 갈팡질팡하면서 마음을 다잡아가는 과정은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다. 업주들은 말하곤 했다. “한번 돈맛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돌아오게 된다.” 당시 저자를 구한 것 중 하나는 업소에서 가져온 짐, 그 속에 숨어 있던 부러진 팔찌였다. 가족한테 차비를 달라고 말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시절, 팔찌를 팔면 얼마간 생활비를 변통할 수 있었다. 그는 “부러진 팔찌가 없었다면 나는 다시 돌아가야만 했을까”라고 자문한다.

소싯적 배운 미싱 기술로 공장에 취업했지만 행여나 성매매 여성이었다는 과거사가 드러날까 조마조마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동료에게 업소에서 하던 말버릇으로 “언니, 옷 ×나게 좋아 보여요”라고 무심결에 말했다가 과거를 들켜버린 것 같아 공장을 그만둔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경험을 지닌 여성들이 모여 울분을 토하는 ‘자조모임’에 가입하고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저자는 비로소 ‘진짜 나’를 만나게 됐다. 동생한테는 뒤늦게 10대 시절 성폭행당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동생의 눈물에서 나는 끈끈한 자매애를 느꼈다. 당당해지자고 마음먹었다. 내 경험이 나를 갉아먹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을 폭력이라고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누구나 탈(脫)성매매의 지난한 과정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자원’이 없는 성매매 여성이 자립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도 가늠해보게 된다. 저자는 “다른 사람의 성을 구매하는 행위에 대해 ‘필요악’이라는 궤변으로 포장하는 문화가 사라지기를 바란다”면서 “내가, 내 친구가, 내 가족이 안전한 세상을 원한다”고 썼다.

책을 다 읽고 저자한테 그토록 스산했던 시절을 버텨낸 힘이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그는 “꿈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답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어요. 꿈이 없으니 본능에 이끌려서, 살기 위해 살았던 거죠. 물론 같이 고생한 언니들도 큰 힘이 됐어요. 간혹 성매매하는 남성 중 ‘좋은 구매자’도 있지 않냐고 묻는 분들이 있어요.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성매매 여성을 ‘사람’으로 대하는 구매자는 한 명도 없었다는 거예요.”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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