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흥우] 외교상 기피인물

국민일보

[한마당-이흥우] 외교상 기피인물

입력 2019-12-07 04:05

대사나 공사 등 외교사절을 외국에 파견하려면 주재국의 동의, 아그레망(agrement)을 받아야 한다. 이수혁 주미대사가 일찍이 대사에 내정되고도 오랫동안 부임하지 못한 이유도 미국 정부의 아그레망을 못 받아서다. 아그레망은 통상 요청 후 20~30일 지나면 받는 게 국제 관례인데 이 대사의 경우 두 달 가까이 나오지 않았다. 아그레망은 정식 임명된 외교사절을 상대국이 거절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국가 간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제도다.

그러면 아그레망을 받고 부임한 외교관이 주재국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국 정부가 알아서 교체해주면 좋으련만 국가 체면상 그런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고 인사권이 없는 주재국이 발만 동동 굴리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외교상 기피인물’, 외교 용어로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를 선언하는 방법이 있다. 외교관이 민형사상 면책특권을 이용해 주재국에서 불법으로 정보를 수집하거나 외교관계에 문제를 일으켰을 때 종종 언급된다.

주미 영국대사가 본국에 보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험담하는 외교 기밀문서가 지난 7월 언론에 공개돼 미·영 간에 설전이 벌어진 적이 있다. 문서에는 트럼프에 대해 “서툴고 무능하다” “대통령은 불명예스럽게 임기를 끝낼 것”이라는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주미 영국대사를 외교상 기피인물로 선언, 그의 경질을 요구했다. 영국 정부는 한동안 버티다 대사의 자진 사퇴 형식으로 트럼프 요구를 수용했다. 2017년엔 여러 유럽 국가들이 북한의 6차 핵실험에 대한 항의 표시로 자국 주재 북한 대사를 외교상 기피인물로 지정, 추방한 전례가 있다.

군인 출신인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전임 대사와 달리 자주 설화의 중심에 선다. 국회 정보위원장을 관저로 불러 방위비 분담금으로 50억 달러를 내라고 무려 스무 번 이상이나 언급하는가 하면 여야 국회의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해 “종북좌파에 둘러싸여 있다”고 지적했다. 지나친 간섭이자 외교 결례다. 일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해리스 대사를 외교상 기피인물로 선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시나브로 커지고 있는 건 해리스 대사의 자업자득이다.

이흥우 논설위원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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