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이영미] 뽑고 보니 강남 학생이라면

국민일보

[돋을새김-이영미] 뽑고 보니 강남 학생이라면

입력 2019-12-10 04:04

“뽑아놓고 보니 강남 학생들인 것과 강남 학생들이라 뽑은 건 다르다. 강남 학생들의 정시 진학률이 높은 건 부모의 교육열 및 유전적 요인, 학생의 실력 노력 성실성 때문이다.”

나무위키 ‘정시 대 수시 논란’ 중 한 대목이다. 점수대로 뽑고 보니 강남 학생이 많은데 어쩌겠냐고. 들어본 정시 옹호론 중 제일 명쾌했다. 정시는 학력고사처럼 수능 성적만으로, 수시는 고교 3년 내신성적과 각종 비교과활동(봉사, 교내 대회 등) 등으로 대입을 결정한다. 고소득층 학생들의 수능 성적이 높아 정시에 유리하다는 비판에 대한 반박이었다.

2000년 이후 수시 확대의 명분은 분명했다. 수능이라는 1회 시험으로 전국의 학생을 한 줄로 세우는 획일적 대입을 지양하고, 고교 교실을 문제풀이에서 해방시키자는 것이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저소득층·비수도권 학생의 수시 성공률은 정시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수시 확대=사회적 약자 배려’로 여겨졌다. 대학 진학 후 학업 성취율도 수시 입학생이 정시보다 높았다. 대학은 우수한 학생에 만족했고, 고교는 수업권 회복을 환영했다. 교육 전문가들도 창의성 교육의 희망에 부풀었다. 모두가 기뻐하는데 딱 한 부류, 교육 소비자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수시는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유독 박한 평가를 받았다. 한 축은 내신부정, 상(賞) 몰아주기 같은 불공정 의혹이었다. 다른 쪽에는 깜깜이 평가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다. 결과가 공정하면 뭐하나, 과정이 불공정한데. 나무위키의 익명 저자들은 ‘뼈 때리는’ 결론에 도달한다. “수시가 지난 10년간 학생을 괴롭힌 건 결과적 평등을 중시하는 현 진보 기성세대의 관점이 수시에 그대로 들어가서였을 뿐이다.”

수시 반대파 입장은 구구절절 이해가 간다. 겪어보니 그렇다. 거리를 둔 채 바라보는 수시는 좋은 제도다. 하지만 고3 학부모 입장에선 불편하고 불친절하고 불안한 전형이다. 대입은 패밀리 비즈니스다. 소 팔아 장남 대학 보낼 때도 그랬겠지만, 수시는 가족의 총력전이란 점에서 결정판이다. 수시 시스템에 적응하려면 학력진단부터 사교육 설계, 비교과활동 컨설팅, 생활지도, 스트레스 관리, 원서접수 전략까지 가족의 자원이 총동원돼야 한다. 선택지가 너무 많고, 결과의 스펙트럼도 넓기 때문이다.

내가 그걸 제대로 해냈다는 게 아니다. 하지 않은 선택과 가지 않은 길, 해주지 못한 조언으로 단계마다 걱정과 후회가 따랐다. 대입이 정시라는 단일 트랙이었다면 갖지 않았을 미안함이었다. 공교육이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직장맘에 수도권 일반고’ 스펙 탓인가. 매번 자책했다. 지난 1년, 수능으로 줄 서면 맘이라도 편하겠다는 생각을 수시로 했다.

교육부는 지난달 28일 대학, 고교, 교육전문가 반대를 모두 무릅쓰고 2023학년도부터 서울 주요 대학 16곳의 정시 비중을 40% 이상 늘리도록 권고하는 대입 개편안을 발표했다. 2000년 시작된 수시 확대의 견고한 흐름을 일거에 반전시킨 결정이다. 배경에는 수시에 대한 교육 소비자들의 반발이 있었다. ‘조국 사태’가 불신을 키웠고, 여론이 나빠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여론이란 것, 학부모 반발에 공동체는 얼마만큼의 가중치를 줘야 하는 걸까.

고3 학부모로 1년을 보내고 나서 깨달은 건 대입제도를 설계할 때 학부모 목소리가 절대선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실은 어떤 주장보다 편파적이고 부실한 것일 수 있다. 각자가 처한 상황이, 아이의 성향과 스펙이 유불리를 가르기 때문이다. 엄마인 나는 정시를 선망했지만, 시민인 나는 수시 확대를 지지한다. 대입은 인재를 길러내는 거대한 순환 시스템의 일부다. 21세기에 다시 문제풀이로 돌아가는 게 최선일 리 없다. 그래서 꼭 말해두고 싶다. 수시는 친절해져야 마땅하지만, 그게 정시 확대로 이어지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아직도 많은 전문가가 수시 개선이 해법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이영미 온라인뉴스 부장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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