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우 칼럼] 물이 썩었는데 물고기만 바꾼들

국민일보

[이흥우 칼럼] 물이 썩었는데 물고기만 바꾼들

입력 2019-12-18 04:01

선거 때마다 40% 넘게 대폭 물갈이해도 정치가 나아지긴커녕 오히려 퇴보
후진적 하향식 공천제 존속하는 한 정치개혁 요원
사람 아닌 시스템 혁신이 먼저… 근본적 해법은 개헌


누구는 못 달아서 안달인 금배지를 달지 않겠다며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는 의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에선 이해찬 대표를 비롯해 원혜영 백재현 이철희 표창원 이용득 의원이, 자유한국당에선 김무성 김세연 김영우 김성찬 의원 등이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이들의 불출마는 타의에 의한 불출마와는 차원이 다르다. 상당수가 내년 4·15 총선에 출마해도 어렵지 않게 당선될 역량과 지지 기반을 갖춘 의원들이다. 이들의 불출마를 두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을 얘기하는 이들이 적잖은 이유다. 정작 나가야 될 의원은 남고, 있어야 될 의원이 나가는 셈이니 가뜩이나 난장판 국회가 더 난장판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물갈이론이 거세다.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의원조차 불출마를 선언하는 마당에 존재감이 미약한 의원들은 좌불안석이다. 각 당은 인적 쇄신을 명분으로 내년 공천에서 현역 의원을 대거 갈아치울 태세다. 실천에 옮길지 미지수나 한국당은 현역의원 50% 물갈이를 공언했다. 덩달아 민주당의 물갈이 폭도 커질 듯하다. 각 당은 총선 때마다 경쟁적으로 물갈이를 실시했다. 17대 때는 전체 의석의 62.9%, 18대 44.5%, 19대 49.3%, 그리고 임기 만료를 목전에 둔 현 20대 국회는 44.0%가 초선 의원이다. 총선 때마다 예외 없이 40% 넘는 정치 신인들이 국회에 입성했다. 그럼에도 국회와 정치는 나아진 게 없다. 오히려 퇴보했다고 하는 게 적확한 진단이다. 역대 최악의 국회라는 평가를 듣고 있는 20대 국회를 보면 그렇다.

사람이 바뀌어도 정치와 국회가 바뀌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후진적 공천제도에 있다. 밀실에서 몇 명이 공직후보를 결정하는 우리의 공천제도는 선진국에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아무리 물갈이를 해도 물이 곧 혼탁해지는 건 물의 문제라기보다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의원이 응당 있어야 할 곳은 국회다. 그럼에도 걸핏하면 국회를 박차고 농성 중인 당대표 주위를 배회하는 건 그가 공천권을 쥐고 있어서다. 상황이 이러니 당 의사에 반하는 행위는 정치적 자살행위요, 언제나 헌법적 가치보다 당론이 우선이다. ‘자기정치’가 사실상 불가능해 아무리 물갈이를 해도 그 나물에 그 밥인 거다.

한때 정치권에서 공천권을 당원이나 국민에게 돌려주자는 입법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곧 흐지부지됐다. 대표를 비롯한 기득권자의 벽은 높았다. 정의당은 모든 공직후보를 당원투표로 선출한다.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객관적 방법으로 후보를 뽑으니 다른 당에선 흔한 공천파동 같은 뒤탈이 없다. 의원들이 대표 눈치보는 일도 적다. 중앙당이 공천권을 내려놔야 당을 위한 정치가 아닌 국민을 위한 정치가 가능하다. 각 당이 경선을 확대하는 건 바람직한 추세다. 그러나 전략공천이란 미명 하에 하향식 공천을 계속하는 한 줄세우기 정치는 필연이다.

선거제도 또한 국민의 의사가 보다 정확하게 반영되도록 개선해야 한다. 우리는 여러 선거제도를 경험했다. 단명에 그쳤으나 양원제도 해봤고, 대통령이 전체 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하는 유신체제, 1선거구 2인제와 원내 제1당이 비례대표(92석)의 3분의 2를 가져가는 5공화국 선거제도도 경험해봤다.

유신체제와 5공의 선거법은 집권당이 아주 손쉽게 과반 의석을 확보하도록 여당에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었다. 그 결과 김영삼·김대중 양김의 돌풍이 거세게 불었던 12대 총선에서 전두환의 민정당은 고작 35.2% 득표율로도 전체 의석의 53.6%(148석)를 가져갔다. 반면 신민당(29.3%)과 민한당(19.7%)은 49.0%를 득표하고도 102석에 그쳤다. 민의대로라면 12대 국회는 마땅히 여소야대 국회가 돼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이에 비해 현 선거제도는 민의 반영률이 현저하게 나아졌다.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선거구 인구 편차를 2대 1로 조정해 표의 등가성도 높였다. 비례성 또한 개선됐다. 그렇다고 민의 왜곡이 없어진 건 아니다. 현재 막판 진통을 거듭하고 있는 선거법 협상의 핵심도 비례성을 얼마나 인정하느냐에 있다. 여야가 당초 합의한 225(지역구) 대 75(비례대표)안은 250 대 50으로 후퇴했고, 연동률도 50% 적용에서 더 축소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래서는 민주당과 한국당이 국회 절대 의석을 차지하는 적대적 공생관계의 고리를 끊어낼 수 없다. 사표를 줄이려는 선거제 개혁의 본래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 4년 후 국회 모습이 지금과 다르려면 사람에 앞서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개헌으로 이어져야 한다.

고 노회찬 전 의원은 고기를 잘 구으려면 불판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백재현 의원은 불출마를 선언하며 “(우리는) 물고기만 바꿨을 뿐 물을 한 번도 바꿔본 적이 없다”고 일갈했다. 맞는 말이다. 썩은 물에 1급수 어종을 풀어놔봐야 물고기는 살지 못한다. 물을 바꾸고 불판을 바꿔야 한다.

논설위원 hw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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