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탐사] 죽음조차 가난했던 사람들의 흔적 추적기

국민일보

[이슈&탐사] 죽음조차 가난했던 사람들의 흔적 추적기

[빈곤의 종착지, 무연고 죽음 370명의 기록] ⑥·끝 무연고 장례 40일간의 기록

입력 2019-12-26 00:10
사진=윤성호 기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178-1번지 서울시립승화원. 서울에서 죽은 사람이 아무 연고가 없는 것으로 판정되면 이곳에서 화장된다. 국민일보는 지난 두 달간 올해 화장된 무연 사망자들의 생전 연을 추적하면서 이곳도 방문해 장례를 함께 치렀다.

지난달 6일부터 지난 15일까지 40일간 62명의 장례가 있었다. ‘탈북모자 아사 사건’(11월 28일) ‘성북 네 모녀 사건’(12월 10일) 당사자들도 이 기간 장례가 치러졌다. 이들처럼 세상에 알려져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장례가 치러진 건 이례적이다. 나머지 56명의 망자들은 언제 태어났고, 어떻게 떠났는지 관심 받지 못한 채 화장됐다. 마치 애초에 없었던 사람들처럼 여겨졌다. 화장이 끝나고 건네받은 목재 유골함에는 고인의 마지막 온기가 담겼다.

날 때부터 생긴 연고나 수십 년(올해 화장된 무연고자 370명 평균 나이 62세) 살아가면서 생긴 인연을 끊은 건 가난이었고, 그 연을 다시 붙지 못하게 한 것도 가난이었다. 빈곤한 삶의 현장에서 개인은 고립됐다. 화장터는 그래서 모두가 똑같이 한 줌 재로 돌아가는 곳이지만 죽음에도 계급이 있음을 알려주는 공간이었다.

지난 15일 경기도 고양 서울시립승화원에서 김모씨 장례가 진행되고 있다. 김씨는 지난달 자택에서 숨졌고, 이후 3주 동안 연고자가 파악되지 않아 무연 사망자가 됐다. 국민일보는 올해 서울에서 무연고 장례를 치른 370명의 인생을 추적했다. 윤성호 기자

시선

무연고 사망자 장례엔 얼굴(영정사진)이 없고 상주도 없다. 어쩌다 한 번씩 등장하는 지인의 복장은 허름하다. 가난은 모여살기 때문이다. 보통의 장례를 치르는 이들에겐 그저 이상한 장면이다. 이질적인 모습이 되레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모순은 장례가 있는 날이면 매일 반복됐다.

대체로 무연고 사망자의 화장은 오전 10시 진행된다. 30분 전 운구가 시작되면 대형 고급 운구차 사이로 하얀색 승합차가 들어선다. 그 초라함이 일반 장례를 위한 운구차를 더 화려하게 만들었다. 흰 장갑을 끼고 위패를 든 기자에게 수십 개의 시선이 꽂혔다. 차갑고,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영정 사진도 없네.” 무연고 장례임을 모르는 사람이 혼잣말을 한다.

무연고 장례에는 늘 손이 부족했다. 운구할 때 필요한 성인 남성 6명을 채우지 못한 날이 대부분이다. 다음 순번을 기다리던 타 의전업체 관계자들이 손을 보태고, 고령의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거들었다. “높이 드세요, 높이.” 승화원 직원이 외쳐보지만 위로 번쩍 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휘청거리는 관이 장례의 불안함을 키운다.

화장터로 관이 들어가면 문이 닫힐 때까지 고요하다. 유리문으로 관이 들어가는 동안 옆 화장터에서 들리는 오열 소리가 넘어와 적막한 방을 채운다.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장소로 가는 동안 시선은 바닥에 둬야만 했다. 지나가는 사람 눈이라도 마주치면 “여긴 뭐하는 거예요?”라는 질문을 받아야 한다. 울어주는 이가 없는 장례는 신기할 뿐이다.

부패

정담의전 이영희 대표는 시신을 본 적 있는지 물었다. “그럼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을 참관했었다. 그럼 놀라지는 않겠다는 듯 몇 명의 사진을 보여줬다.

“부패가 너무 많이 진행돼서 신원 확인에 애를 먹었어요.” 첫 사진은 미라화가 진행된 시신이었는데 몰골이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두 번째 사진은 온몸이 페인트칠한 듯 붉었다. 몸 절반 이상에 3도 화상을 입은 강세영(가명·75)씨다. 화재 사고였다고 했다. 주민등록주소지가 은평구 한 동사무소였던 강씨는 화상 치료 중에 ‘패혈성 쇼크’로 숨졌다.

무연고 사망자는 시신 수습이 어렵다. 대부분 발견이 늦어 부패가 많이 진행되는데, 한겨울 전기매트를 틀어놓고 죽으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시체가 완전히 부패한다고 한다. “그런 고인한테 수의를 입히고 염을 하죠. 구더기는 일상이라고 해야 하나….” 이 대표가 말했다.

부패한 시신 검안 기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구더기 침습’이다. 길이까지 적혀 있다. 이 대표는 “부패가 진행되면 하얗게 수포가 일어나는데, 온몸을 수포가 덮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김문종(54·가명)씨는 수의 입히기도 쉽지 않았다. 그는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마지막 고통이 심해 몸을 웅크린 채 죽었다. 임종을 지켜본 지인이라도 있었다면 몸이 굳기 전 곧 시신을 폈을 텐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웅크린 자세 그대로 몸이 경직돼 그의 관을 맞춤 주문해야 했다.



선물

분골된 유해를 유택동산에 뿌리는 ‘산골’까지 마무리하면 장례상에 놓았던 밥과 국, 사과와 감, 대추, 배, 생선 나물을 다시 일회용 접시에 담아 포장한다. 음식은 곧 동자동이나 돈의동 쪽방촌 주민들에게 전달된다. 주말에는 승화원 시설 미화원들에게 전달한다.

“누구는 부정 탄다고 안 먹는대요. 근데 그게 뭐 대수라고. 난 고맙다고 하고 먹어요.” 동자동 사랑방에 제수용 음식을 싣고 갔던 날이었다. 동네 사랑방 큰 테이블에 올려두면 사람들이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도착하는데 오는 사람은 늘 비슷했다. 공영장례를 지원하는 ‘나눔과나눔’ 측은 “고인이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그렇게 연결돼 있는 듯했다.

전화번호

10년 가까이 서울 영등포구의 한 고시원에서 살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서장호(가명·57)씨가 남긴 유품은 작업복과 구형 폴더형 휴대전화 1대가 전부였다. 병원비 걱정 때문이었는지 끝까지 병원을 안 가고 버티던 서씨는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갔다. 이후 고시원에서 함께 생활하던 지인이 서씨 휴대전화를 확인했는데 단 하나의 전화번호도 저장돼 있지 않았다고 했다. 대개 몇 달 치 기록이 남아 있는 최근 통화 내역에는 관공서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전화 두 통만 있었다. 발신 전화는 단 한건도 없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더 이상 활동을 못하게 되면 전화번호를 다 지워버려. 이상하게 사람들이 그러더라고. 우울증 같은 게 오나봐.” 지인이 말했다.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있는 건물. 지난 23일 방문한 건물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외벽에는 붕괴 위험성을 경고하는 ‘재난위험시설 D등급 지정’ 안내판이 붙어 있다. 김판 기자

말소

무연고 사망자들의 생전 흔적을 추적하려면 자주 옮겨 다녀야 했다. 그들의 마지막 주소지인 고시원, 여인숙, 쪽방촌, 인력사무소부터 거슬러 올라갔다. 이전 주소지 역시 판자촌이나 달동네가 있던 곳, 다세대 주택가 밀집 지역, 이미 재개발로 지번이 바뀐 지역 등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흔하게 발견된 건 ‘무단전출 직권말소’ 조치였다. 지금의 ‘거주 불명’과 같은 내용으로 2009년 폐지됐는데, 당시에는 주거가 불분명한 경우 적용하고 주민등록도 함께 말소했다.

지난 8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조준호(가명·51)씨는 23살 때인 1991년 충북 청주시 사직동으로 전입했다. 그의 흔적이 드러난 첫 주소지다.

그러나 불과 8개월 만에 무단전출 직권말소 됐다. 그는 이듬해 11월 재등록과 동시에 전출신고를 한 뒤 청주의 복대동으로 주소지를 옮겼다. 그러나 이번에도 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무단전출 직권말소 됐다. 그는 93년 11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주소지를 올렸다가 두 달 뒤 다시 서대문구 남가좌동으로 옮겼다. 그런데 IMF 외환위기가 터진 97년 다시 무단전출 직권말소가 됐다. 1년 뒤 연희동의 한 다세대주택으로 주소지를 옮겼고, 3년도 안 돼 또 무단전출 직권말소 됐다.

이후로는 창천동 빌라 하숙집과 고시원을 전전했다. 마지막 주소는 서울 마포구 아현동의 한 상가 건물이었다. 조씨를 기억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 지난달 주소지로 갔다. 대로변 지상 5층짜리 건물은 우체국과 병원 사무실이 뒤섞여 있었다. 조씨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3층에 고시원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업했다고 한다.

구청은 조씨 공영장례를 의뢰하면서 그의 등록기준지 난에 ‘확인 불가’라고 썼다. 어디서 왔는지 흔적을 알 수 없고, 빈곤의 지역만 떠돌아다니다 혼자 죽은 것이다.

비슷한 경로는 많았다. 송일영(가명·63)씨는 28세가 되던 84년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에 전입 신고했다. 80년대 경기도 김포와 광명을 오갔고 89년 서울 중랑구 신내동으로 들어왔다. 이후 그의 주거지는 빌라에서 다세대주택으로, 다가구 단독주택 셋방에서 달동네 셋방으로 하향 이동했다. 2002년부터는 사당동 고시텔, 방배동 고시원, 회현동 고시원 등으로 옮겨 다니며 밑바닥 주거생활을 했다. 송씨 역시 IMF 외환위기 여파가 계속된 2000년 무단전출 직권말소 됐고 이후에도 이 기록은 두 차례(2004년, 2009년) 더 생겼다. 2009년부터 2017년까지 주소는 동네 주민센터로 돼 있었다. 8년간 주민등록번호가 말소된 상태로 살았다는 의미다. 이후 등장한 주소는 중림동 인력사무소와 회현동 고시원이었다. 그의 마지막 주소지였던 고시원 주인은 “이름은 기억나는데 그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송씨는 지난 9월 간암으로 죽었고, 자녀들은 관계 단절을 이유로 시신인수를 거부했다.

강택순(가명·68)씨는 29세 때인 80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전입 신고했다. 그는 2년 만에 주민등록이 말소됐다. 그리고 5년 뒤 인천 북구 부개동(지금은 부평구)에 전입신고를 했지만 또 채 1년이 되지 않아 말소됐다. 90년부터 2007년까지는 재개발이 이뤄지기 전 용산구에서 살았다. 이곳에서 말소와 재등록을 반복하다가 서울역 인근 쪽방촌으로 옮겼다.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은 “그가 용산 철거민이 맞다. ‘거지 아파트’에도 살았다”고 기억했다. 거지 아파트는 환경이 워낙 열악해 자기들끼리 부르는 말이었다. 지난 23일 방문한 건물 외벽에는 붕괴 위험성을 경고하는 ‘재난위험시설 D등급 지정’ 안내판과 ‘피해가 발생할 수 있으니 접근을 금지해 달라’는 문구가 붙어있었다. 그곳에서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90년 당시 용산역 일대는 오래된 건물들과 낡은 상점들이 많았다. 당시의 쪽방촌이라고 볼 수 있다”며 “30대 때 인천에서 용산역으로 왔다면 더 많은 일자리를 찾아 옮겨왔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 “여유가 있으면 쪽방 생활을 하다가 여유가 없으면 거리로 나가 주민등록이 말소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비영리단체 ‘나눔과 나눔’이 기록해 놓은 무연고 사망자 명단. 최현규 기자

에필로그

370명의 인생은 대한민국 빈곤층의 기록이다. 단절이 시작되는 과정에선 다양한 이유가 중첩됐지만 대체로 경제적 위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경우가 많았다.

허준수 숭실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무연고 사망은 인적 연계망과 멀어지면서 굉장히 오랜 시간 고립된 생활을 지속한 개인의 마지막 단계”라고 정의했다. 이어 “무연고 사망자가 마지막 거주지로 가게 된 이유가 중요하다”며 “경제적 궁핍, 건강상 문제, 사업 활동의 파산 등이 원인인데 절대 빈곤층이나 빈곤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더 취약한 구조”라고 말했다.

극빈자들은 죽지만 그들에 대한 통계는 줄지 않는다. 죽어 나간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한국도 일본처럼 고령 고독사가 많지만 50, 60대 중장년 무연사가 늘고 있는 건 독특한 현상이다. IMF 외환위기와 같은 국가적 파동에서 인생이 흔들린 뒤 구제받지 못했던 당시 30, 40대가 가정의 해체와 경제적 추락을 연이어 받으며 고립된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지난 4일 화장된 나성연(가명·57)씨 장례엔 노숙인 시설에서 함께 지냈던 지인 14명이 참석했다. 무연고 장례에선 이례적으로 많은 인원이다.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60대 여성이 명함을 달랬다. “난 집이 없거든요. 보통 서울역이나 영등포역에서 지내요. 나도 나씨처럼 되는 건가 해서…. 명함이라도 갖고 있으면 좋잖아요.” 이 여성은 의전업체 대표에게도 다가가 명함을 건네받았다. “왜, 죽으면 처리해 달라고 하게?” 옆에 있던 사람이 묻자 여성이 웃는다. 그들 대부분은 휴대전화조차 없었다. 죽음 자체보다 무연사가 더 염려스러운 듯했다. 지인 장례를 보며 어땠는지 묻자 여성은 “그냥 힘들지. 마음이…”라고 말했다. 장례를 마친 뒤에는 모두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슈&탐사팀=전웅빈 김유나 정현수 김판 임주언 기자 im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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