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용납 않되 용서하다

국민일보

[바이블시론] 용납 않되 용서하다

조정민 베이직교회 목사

입력 2019-12-27 04:04

용서는 누구나 힘든 일입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정작 같은 일을 내가 겪게 되면 용서하는 것이 죽기보다 힘들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내 감정이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도 아십니다. 그래서 기대하지 않았던 약속을 하시고 뜻밖의 선물을 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는 약속을 하셨고, 내가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하시고 약속대로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 결과 나는 못하지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은 하십니다. 나는 세 번도 용서하지 못하지만 내 안에 오신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하십니다. 그 용서를 위해 오셨으니 그 일만은 양보가 없으십니다. 따라서 그분을 주인으로 고백한 사람이라면 누구건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용서하면 모든 것을 용납해야 합니까? 성경은 이 점에서 분별력을 요구합니다. 선은 악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죄를 용납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수없이 용서하시지만 단 한 번도 죄를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죄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대상으로 지목합니다. 하지만 죄를 용납하지 않고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 십자가는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의 상징이었고 유대인들에게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이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용서할 수 있기 때문이고 십자가를 져야 용납할 수 없는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죄 없는 사람이 져야 효력을 지닙니다. 죄 있는 사람이 지는 십자가는 단지 자기 죄의 삯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용납할 수 없는 죄의 대가를 남김없이 모두 치르시고 죄인들을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후로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 또한 용납과 용서의 분별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국의 노예무역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생을 바쳐 노예무역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노예무역선의 선장이나 선주도 고소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그를 도왔던 클레팜 공동체는 용납해선 안될 일과 용서해야 할 사람들을 혼동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때문에 더 많은 에너지를 합당한 목적에 쏟아 붓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또한 노예제도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남북전쟁이라는 내전을 겪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용납하지 않음으로 지켜야 할 가치를 지켰습니다.

마틴 루서 킹과 넬슨 만델라는 흑백 인종차별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수많은 흑백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이 이미 그들을 용서하셨다는 것을 알았던 때문입니다. 그들은 끝내 흑백 인종차별제도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둘 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킹 목사는 암살당했고, 만델라는 27년간 옥고를 치렀지만 용서와 화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용납해서 안될 일은 용납하고 용서해야 할 사람은 용서하지 못한 채 나라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지 않습니까?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될 이념이나 관행은 버젓이 용납하면서 절대로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옹졸한 자들로 인해 갈등과 분열이 더 이상 봉합할 수 없는 위기로 치닫고 있지 않습니까?

조정민 베이직교회 목사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