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우리는 나라를 잃은 적이 없다

국민일보

[너섬情談] 우리는 나라를 잃은 적이 없다

황교익 칼럼니스트

입력 2020-01-08 04:07

1910년 한일병합으로 “우리는 나라를 잃었다”고 표현한다. 일제 35년간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내 생각은 다르다. 우리는 나라를 잃은 적이 없다.

조선은 왕에게 모든 권력이 있었다. 조선은 왕의 나라였다. 1899년 고종은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면서 국가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 대한제국 ‘국제’에 명시하였다. 국제란 지금의 헌법 같은 것이다. 제2조이다.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으로 보면 500년 전래하시고 이후로 보면 만세에 걸쳐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 고종은 전제정치를 공표하였다. 모든 권력은 고종에게 있었다. 이 땅과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에 대한 통치 권한이 고종 1인에게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됐다. 그 병합의 성격과 내용이 한일병합조약에 명시돼 있다. 제1조이다.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한일병합조약은 고종의 권리를 일본 왕에게 이양하는 조약이다. 쉽게 풀면, 당시 조선반도의 땅과 조선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일본 왕에게 넘긴 것이다.

나라를 잃은 것은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다. 아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고종 역시 나라를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다. 고종을 포함한 조선 이씨 왕족은 한일병합 이후 일본 왕족으로 신분 세탁을 하여 일제 35년간 일본 왕족으로 살았다. 조선 왕족은 식민지 조선에 대해 일정한 지분을 유지하였던 것인데, 한일병합조약을 조선 왕족 입장에서 보자면 일본 왕족에게 ‘우호적 M&A’를 당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크게 양보해 조선 왕족이 나라를 잃었다 하여도, 망국의 왕족이면 당하기 마련인 멸족은 면하였다. 조선 왕과 일본 왕의 거래가 어떠하든 당시 조선반도의 백성은 한일병합조약의 당사자가 아니었다. 대한제국의 백성에게는 주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라를 잃었다고 할 수는 없다. 빼앗길 것이 없는데 빼앗겼다고 할 수는 없다. 조선반도의 사람들은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 고종의 ‘소유물’이었다가 일본 왕의 ‘소유물’로 등기이전을 당한 것일 뿐이다.

놀랍게도 이때에 조선인에게 대각성이 일어난다. 본국의 왕과 타국의 왕끼리 자신들을 팔고 사는 행위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고, 마침내 시민으로서의 주체의식이 발생한다. 2017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때의 상황을 이같이 설명했다.

“국민주권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처음 사용한 말이 아닙니다. 백 년 전인 1917년 7월, 독립운동가 14인이 상해에서 발표한 ‘대동단결선언’은 국민주권을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천명했습니다. 경술국치는 국권을 상실한 날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주권이 발생한 날이라고 선언하며, 국민주권에 입각한 임시정부 수립을 제창했습니다.”

경술국치란 말은 한일병합을 국민이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문 대통령은 그 부끄러움을 투쟁의 의지로 바꾸어버렸다. “국민주권이 발생한 날”이라는 이 지극히 단순한 말 한마디로.

“나는 왕의 소유물이 아니다.” “나는 내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 한일병합으로 민주공화정의 시민의식이 탄생했다. 국민주권에 대한 관념이 생겼다. 그 국민주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국가를 기획하게 되었고, 그 의지들이 모여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다. 독립운동이면서 민주혁명이다. 그렇게 하여 민주공화정의 임시정부가 탄생했고, 지금의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다.

텔레비전과 영화 등등에 역사물이 넘쳐난다. 한결같이 조선 왕족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붙이고 있다. 민주공화국의 시민에게 왕정의 절대군주와 그의 가족을 사모하라고 등을 떠민다. 백성을 잘 다스렸던 왕들이면 받아들일 만한 일이다. 자신의 백성을 일본 왕에게 넘기고 자신은 일본 왕족으로 살았던 그들에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한 번쯤 역사적 성찰을 해볼 필요가 있다. 나라를 잃은 적이 없는 우리에게 나라를 잃은 듯이 연출된 조선 왕족을 우리 눈앞에 계속 등장시켜 얻어낼 수 있는 역사의식은 과연 민주공화정 대한민국에 적합한 것인지 묻고 싶다.

황교익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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