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흥우 칼럼] 이제 유권자의 시간

국민일보

[이흥우 칼럼] 이제 유권자의 시간

입력 2020-01-08 04:01

90여일 앞둔 4월 총선, 중앙·지방정부에 이어
의회권력 탄핵 민심에 따라 재편하는 의미있는 선거
‘동물적’ 20대 국회와 확연히 다른 21대 국회 원하면 유권자도 달라져야


총선이 목전에 다다랐다. 그 룰을 다루는 공직선거법은 동물국회를 거친 끝에 겨우 지난 연말에서야 확정됐다. 예비후보 등록이 진작 시작됐지만 내 선거구가 인구 분포 변화에 따라 조정되는 건지, 아닌 건지 아는 이가 없다. 선거법에 국회의원 선거구는 중립적인 선거구획정위원회가 결정해 선거일 1년 전까지 국회의장에게 제출토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규정이 지켜진 전례가 없다. 정치권이 깜깜이 선거를 방조 내지 조장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최악의 국회로 20대 국회를 꼽는 이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국정 현안을 논의한 시간보다 상대를 향해 악다구니질하며 대선 시간이 훨씬 많으니 평가가 틀렸다 말할 수 없다. 그래도 막판에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처음 총선에 도입한 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법안을 통과시켜 체면치레는 했다. 여기에 더해 검경 수사권을 조정하는 검찰청법과 형사소송법, 학부모의 관심이 지대한 유치원 3법 등의 개정을 모두 마무른다면 최악의 국회라는 오명을 조금이라도 벗을 듯하다. 자유한국당이 민생법안 필리버스터를 철회하고 여야 합의로 9일 국회 본회의를 열기로 한 만큼 조금의 희망은 보인다.

광화문과 서초동. 지난 한 해 우리 정치를 규정하는 상징이다. ‘태극기’와 ‘촛불’의 세대결로 나라가 참 시끄러웠다. 그래도 두 세력이 물과 기름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극단적 폭력 대결로 치닫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주의, 주장을 펼치며 상대의 선을 넘지 않았다는 것은 사회가 그만큼 성숙해진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 정치의 한계를 말할 때 가장 자주 거론되는 요소가 증오와 편가르기다. 조국 사태를 계기로 지난 한 해 지겹도록 광화문, 서초동 집회를 보며 나라의 미래를 걱정한 이들이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이 같은 증오와 편가르기가 한국 정치만의 특수한 현상일까. 그건 아닌 모양이다. 알리 마즈루이 전 미시간대학 정치학과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증오와 편가르기야말로 일반적인 정치 행태다. 그는 “증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행동 욕구를 느끼기 위해서는 적이 필요하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대립구도는 정치 영역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양상”이라고 했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지난해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군 진영 대결은 정치의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보수와 진보는 광장과 아스팔트에서 상대를 향해 마음껏 증오를 분출했다. 누가 광장의 승자인지 가리는 건 부질없다. 원 없이 서로의 주의, 주장을 펼쳤으면 그것으로 족할 일이다. 그럼에도 기어이 자신들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두 진영이 그토록 원하는 승부는 총선에서 객관적으로 판가름난다.

중요하지 않은 선거가 있을까마는 90여일 앞으로 다가온 이번 4·15 총선의 의미는 특히 남다르다. 중앙 및 지방정부 권력은 탄핵 민심에 따라 재편됐다. 그러나 의회권력만은 탄핵 이후에도 3년 가까이 탄핵 이전 상태에 머물렀다. 이제 의회권력도 탄핵 민심을 반영한 새로운 세력 분포로 재편될 날이 멀지 않았다. 4·15 총선을 통해 비로소 탄핵 절차가 마무리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4·15 총선의 가장 큰 의미다.

새해 벽두 쏟아진 여론조사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부동층이 많다는 사실이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문재인정부도 박근혜정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양비론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여기에 더해 무한 반복되는 난장판 국회를 보며 정치 혐오가 임계점을 넘어 ‘지지 정당 없음’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론된다. 한마디로 그놈이 그놈이라는 게다. ‘걔도 싫고, 쟤도 싫다’는 양비론은 편하다. 열 받을 일이 없어서 그렇다. 오십보 백보라지만 오십보와 백보 사이엔 엄연히 오십보의 차가 있다. 기준치에 미달하더라도 누가 더 잘못했고, 덜 잘못했는지 따져봐야 차별성이 보인다.

‘최소 극대화의 규칙’이라는 게 있다. 최악의 것 중에서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원칙으로, 존 롤스의 ‘정의론’에 나온다. 최선일 때 큰 이점이 없다 할지라도 최악일 때 견딜 만한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유권자의 기준도 이랬으면 한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선택을 포기하면 견딜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 있어서다. 좋은 후보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나쁜 후보 중에서 가장 덜 나쁜 후보를 뽑는 게 ‘최악일 때 견딜 만한 선택’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야 정치가 반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간다.

20대 국회와 확연히 다른 21대 국회를 원한다면 유권자의 선택이 중요하다. ‘촛불 혁명의 완수’냐 ‘문재인 정권 심판’이냐는 오로지 유권자가 판단할 몫이다.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결과가 어떻든 4·15 총선을 계기로 광장의 정치도 좀 더 성숙해졌으면 한다. 바야흐로 유권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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