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리포트] ‘멀티 페르소나’, 낮엔 회사원 저녁엔 요가강사

국민일보

[20대 리포트] ‘멀티 페르소나’, 낮엔 회사원 저녁엔 요가강사

<1부> ② ‘일하는 나’와 ‘즐기는 나’는 다르죠

입력 2020-01-15 04:03 수정 2020-01-15 18:03
20대들은 모두 직장과 취미가 구분되는 삶이 피곤하기보다는 나름의 재미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메이저리그 팟캐스트를 녹음하고 있는 서울대 로스쿨 재학생 김현철(가장 왼쪽)씨. 김현철씨 제공

20대의 가장 큰 특징은 상황과 장소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각각 다른 상황과 장소에서 여러 자아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이런 젊은 세대의 모습은 ‘멀티 페르소나’라고도 불린다. 국민일보는 취미를 또 하나의 삶으로 대하고 있는 20대 5명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낮과 밤, 다른 삶 사는 20대

요가강사와 패션회사 회사원을 겸하는 이희조씨. 이희조씨 제공

매일 오후 7시가 되면 이희조(27)씨의 모습은 극적으로 바뀐다. 낮에는 서울 강남구의 한 패션회사에서 광고 문구를 고민하지만, 저녁에는 요가복을 입고 10여명 남짓한 수강생들에게 요가 자세를 꼼꼼히 가르치는 강사가 된다. 이씨는 대학생 때인 2016년부터 요가를 시작했는데 지난해 11월부터는 요가원에서 정식으로 수업을 제안받았다.

요가 수업을 시작한 뒤부터 이씨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무작정 취미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고 지도하게 되면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찾게 됐다. 지난 6일 만난 이씨는 “잡지사 기자로 일했던 경력을 살려 이직해서 아직 완전히 일이 손에 익지 않은 데다 새로운 대인관계도 적응하느라 힘들었다”며 “그런데 요가원에서는 내가 먼저 회원들에게 편안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야 하는 입장이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민이 있어 보이는 회원들에게는 먼저 차를 내주며 이야기를 주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놀랄 때도 있다”고 말했다.

지성은(가명)씨가 자신이 독립출판한 책을 들고 있는 모습. 지성은(가명)씨 제공

특수학교 교사 지성은(가명·28)씨는 최근 10년 만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책을 2권 내는 데 성공했다. 나만의 책을 찍는 일은 고등학생 시절 잡지 한 권을 본 뒤 막연히 갖고 있던 꿈이었다. ‘메뉴판’이라는 제목의 24쪽짜리 책에는 청각장애인이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등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피 메뉴를 수화로 표현하는 방법을 그림과 손동작 설명으로 함께 담았다.

책 50부를 찍어낸 뒤에는 직접 전국의 독립서점들에 메일을 보내 자신의 책을 홍보하기도 했다. 지씨는 “직장에서는 장애학생들을 돌보는 교사지만 다른 곳에서는 나 자신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해야 할 이야기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책이라는 공간을 통해 구분하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연출가를 지망하는 카페 직원 서준혁(27)씨도 2016년부터 계속했던 세계여행을 마치고 감상과 느낌을 정리한 책 200부를 지난해 직접 펴냈다. 그는 “책이라는 결과물을 냈다는 사실 자체가 일상 속에서 받은 상처를 아물게 하고 용기를 북돋아 줬다”고 말했다.

색다른 취미는 삶의 원동력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재학생 김현철(29)씨는 매주 토요일 오전 법전을 내려놓고 ‘메이저리그 전문가’가 된다. 김씨는 스포츠 기자들과 함께 8년째 팟캐스트 ‘메이저리그 네이션(MLB NATION)’을 진행하고 있다.

평일에 판례를 분석하고 변호사시험 스터디를 하는 그는 녹음실에 ‘온에어’ 등이 켜지면 180도 달라진다. 한 주 동안 있었던 주요 경기 리뷰부터 눈여겨봐야 할 신인선수들의 기록을 줄줄이 읊는다. 지난 연말에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1군 데뷔를 노리는 한국인 유망주도 직접 초청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국내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팟캐스트는 이제 4200여명이 구독하는 큰 콘텐츠가 됐다. 올해는 한 팟캐스트 플랫폼과 독점 송출 계약을 체결했다.

김씨는 지난 7일 국민일보를 만난 자리에서 “메이저리그의 가장 큰 매력은 화려한 스타부터 데뷔가 목표인 신인 선수들까지 저마다의 절절한 이야기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온다는 점”이라면서 “유망주들을 메이저리그가 어떻게 관리하는지 등 기존 언론에서 다뤄지지 않은 점을 물어보고 들을 때는 또 다른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감정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지난해 펜싱대회에 출전한 하원호씨의 모습. 하원호씨 제공

지난해 여름 반도체 회사를 퇴사한 뒤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는 하원호(29)씨는 4년 전 새로운 ‘가면’을 찾았다. 대학 졸업을 1년 앞두고 남는 시간을 채울 취미를 찾던 중 교양수업으로 들은 펜싱 수업에서 흥미를 느꼈다. 학기가 끝난 뒤 서울 마포구의 한 펜싱클럽에 등록해 4년째 투구를 쓰고 플뢰레(펜싱용 검)를 잡고 있다.

하씨에게 펜싱은 치열한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 같은 존재다. 회사에 다닐 때도 매주 서울과 충북 청주를 오가며 찌르기와 베기에 열중했다. 3교대로 반도체 생산공정에 투입되는 힘든 업무였지만 쉬는 날에는 어김없이 서울로 올라와 이틀을 꼬박 검과 보냈다. 매년 열리는 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는 “검을 갖고 싸우는데도 생각보다 많은 힘과 순발력이 필요하다. 펜싱이 일상에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거나 삶의 방향을 바꾸는 큰 결정을 내릴 때도 여유를 갖게 해준다”고 말했다.

‘새로운 나’를 찾는 재미

한 가지 일도 하기 힘든데, 직장과 삶을 완전히 구분하는 삶이 피곤하지는 않을까. 20대들은 모두 새로운 상황이 주는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펜싱을 하는 하씨는 “검을 휘두르면서 성격을 다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면서 “한 번 더 찔러 점수를 얻기 위해 흥분을 가라앉히는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때는 묘한 쾌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메이저리그 팟캐스트를 녹음하는 김씨는 새로운 자신의 모습이 직업이 아니기에 피곤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야구를 너무 좋아해 방송국에서 야구리서치 팀에서 일했는데 오히려 야구를 보는 일이 괴로웠다”면서 “내가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 피곤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요가를 가르치는 이씨도 “같은 요가강사들이나 워킹맘인 회원들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면 생각보다 간단하게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면서 “마음이 더 편해진 상태로 요가를 하게 되니 오히려 피로감을 느끼지는 않는다”고 했다.

황윤태 조효석 기자 trul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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