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우정 (3) 망설이던 아내 “당장 병원문 닫고 캄보디아 가자”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김우정 (3) 망설이던 아내 “당장 병원문 닫고 캄보디아 가자”

10년 후쯤 의료선교 떠나자는 아내에게 손해 보는 연습도 해야 한다고 설득하자 “당신 말이 맞다”

입력 2020-01-17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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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에서 찍은 김우정 원장과 아내 박정희씨 모습.

맞장구를 쳤다. “맞아. 성령님이 주신 생각이야. 우리가 교회에서 크고 결혼하고 리더도 됐잖아. 그동안 병원도 잘되고 물질적인 복도 잘 누리고 살았잖아. 이제는 복을 나눠주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캄보디아에서 살면 어떨까.”

젊어서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부모님이 북한 실향민 출신이어서 의사가 된 후에는 북한 의료선교에 쓰임 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캄보디아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캄보디아에 소아과 의사가 얼마나 필요한지 계속 이야기했다. 그러자 아내도 “맞아, 그럴지도 몰라”라고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아내는 “그러면 애들 결혼 시키고 부모로서 책임을 다했다 싶을 때 가자”고 했다. 10년 후쯤.

내 생각은 달랐다. 가려면 빨리, 당장, 젊었을 때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50세 넘었을 때인데 10년 후, 60세면 기운이 없어 아무것도 못 하지 싶었다. 아내에게 빨리 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1년쯤 지난 2005년 9월 둘째가 군 제대 후 복학했을 때 아내가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캄보디아 가려면 병원을 처분해야겠지? 우리 생활비는 누가 안 도와줄 테니까. 이거라도 팔아야 하지 않아.” 내가 말했다. “걱정 마. 병원 처분하는 것은 일도 아니지. 위치도 좋고 병원도 잘 되니까.”

하지만 병원 보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아내는 “거봐. 하나님의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아. 하나님이 계획하셨으면 병원 처분이 이렇게 어렵지 않을 텐데”라고 했다. 일리가 있었다. 캄보디아 의료선교가 하나님보다 앞서가는 나만의 생각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들었다. 하나님께서 손해 보는 연습을 해 보라는 것은 아닐까. 선교사로 살려면 늘 손해 보듯 살아야 하니까.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다음 날 아침 “당신 말이 맞아. 문 닫고 가자”고 했다.

우리는 2005년 12월 31일 폐업 감사예배를 드리고 문을 닫았다. 병원 입구에 “캄보디아 의료선교사로 떠납니다. 그동안 병원을 이용해주신 환자, 보호자들께 감사드립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였다. 한 달 후 2006년 1월 26일 섬기던 충무교회 선교팀과 같이 캄보디아로 향했다.

가자마자 일할 곳을 구했다. 의사신문 광고를 보니까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한 정형외과에서 캄보디아에 클리닉을 만들었는데 진료할 의사를 구한다고 했다. 클리닉은 프놈펜 남쪽에 있었고 1년 4개월간 일하면서 캄보디아와 의료선교를 배웠다. 그때 의료선교를 제대로 하려면 규모가 있는 병원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현지인 의사도 가르치고 훈련할 수 있어야 지속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이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함께할 사람이 필요했다.

2006년 한국에선 새로운 선교지로 캄보디아가 주목받았다. 캄보디아는 킬링필드의 처참한 시기를 겪고 10여년간 정체 상태에 있다가 회복되고 있었다.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실제로 상당히 많은 서구의 구호단체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전엔 한국선교사들이 중국 몽골 필리핀을 선교지로 선택했다. 하지만 중국은 공산주의로 선교가 어려웠고 몽골은 인구가 너무 적었고 필리핀은 가톨릭이 강세여서 열매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나는 100번째 캄보디아 선교사였다. 지금은 선교사가 1000명 이상 된다. 동역할 의료선교사들이 눈에 띄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설득하고 의논한 결과 2007년 9월 3명의 의료선교사와 함께 헤브론병원을 열었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