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버텨낸 기억이 사랑이라면

국민일보

[창] 버텨낸 기억이 사랑이라면

이용상 뉴미디어팀장

입력 2020-01-18 04:01

잊어선 안 될 것을 까먹어서 난처했던 적이 있는가. 가령 중요한 클라이언트와의 약속이라든가, 연인의 생일이라든가, 칼럼 마감일이라든가. 이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누군가 영화 맨인블랙에 나오는 기억제거장치를 내게 사용해 부모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린다면 얼마나 비참할까. 또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이 부모를 몰라본다는 사실에 얼마나 절망할까.

일본 배우 야마구치 미에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며 자서전을 썼는데 이 책을 읽고 편지를 보낸 독자들의 80%는 만약 치매에 걸린다면 자식에게 시련을 주지 않기 위해 시설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고 적었다고 한다. 소중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다는 건 감히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배우 윤정희씨는 과거 이런 인터뷰를 했었다. “삶이라는 건 젊을 때도 아름답지만 나이 들어도 근사한 것 아닐까요. 추하지 않고 건강하게 늙고 싶어요.” 그러나 최근 윤정희씨가 치매에 걸려 투병 중이란 사실이 알려졌다. 그는 마지막 작품인 영화 ‘시’에서 치매를 앓는 여성을 연기했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본인이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상황이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윤정희씨뿐 아니라 모두가 근사한 노년을 꿈꿀 테지만 중앙치매센터가 추정한 65세 이상 치매 인구는 78만8000명(2019년 기준)이나 된다. 10명 중 1명꼴이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건지는 1995년 일본 존엄사 협회가 3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응답자의 85%는 존엄사 선택 항목에 노인성 치매가 있기를 원했고, 57%는 본인이 치매에 걸리면 치매 정도에 상관없이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싶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치매환자가 사망하면 부모와 자식 간 정나미를 모두 떼어놓고 저세상에 갔다는 말이 나올까. 인터넷엔 하루가 멀다고 현대 과학의 성과를 보여주는 뉴스가 나오지만 치매 치료는 수십 년간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정부도 치매는 국가가 책임지겠다고 선언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런데 얼마 전 만난 서울 영등포구 마리아성모요양병원의 김상용 전문의가 했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다. “병원에 있는 치매를 앓고 계신 할머니 중에 항상 아기처럼 웃고 계시는 분이 있어요.” 김 전문의는 이 할머니를 7~8년 전부터 봐왔다고 했다. 잦은 뇌졸중으로 인지기능이 떨어지면서 치매 증상이 심해져 입원하게 됐다. 그날 이후 아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병원을 찾아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온화한 미소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돌아간다. “아들인 건 못 알아보시는 것 같아요. 그러나 오랫동안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준 존재라는 기억은 남아 있는 거죠. 아들을 바라볼 땐 간병인을 볼 때랑 표정이 달라요.”

인간은 자신에게 위험한 상황이 닥치는 걸 회피하려는 본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 뇌엔 자신을 공격할 것 같은 존재나 부정적인 기억이 더 쉽게 각인된다고 한다. 치매에 걸리면 수많은 기억이 사라지고 일부만 남는데 그게 안 좋은 기억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얘기다. 치매 할머니가 남편에게 공격적으로 대한다면 어쩌면 할머니의 기억 속엔 남편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일 수 있다. 살면서 내 안에 쌓아뒀던 일들이 ‘의식’이란 브레이크가 풀리면서 터져 나온 것이다. 치매 환자가 ‘밥에 독 탔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도 상대방이 자신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이 깎이고 깎였을 때 좋은 기억이 많이 남는다면 치매가 덜 절망스러울 수도 있다.

세계적인 치매 명의인 삼성서울병원 뇌신경센터 나덕렬 교수는 “치매에 걸린 후에도 무리 없이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예쁜 치매환자도 있다”며 “본인이 평소 긍정적인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자 가족이 따뜻하게 품어줘야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수필가 윤세영은 치매를 ‘무의식이라는 저 깊은 우물물을 길어 올리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혹시 소중한 사람이 치매에 걸려 나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릴까 봐 두렵다면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사람 무의식에 있는 깊은 우물이 좋은 기억으로 가득 찰 수 있도록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아낌없이 사랑하는 것뿐이지 않을까.

이용상 뉴미디어팀장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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