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강에서] 설날 아침에

국민일보

[샛강에서] 설날 아침에

김준동 공공정책국장 겸 논설위원

입력 2020-01-23 04:02

이틀 후면 설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저마다 고향으로 향한다. 어머니의 포근한 정(情)에다 고향의 추억에 흠뻑 젖는 시기다. 민족 대이동으로 전국이 몸살을 앓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귀향길은 즐겁다. 명절 풍경이 많이 바뀌고 있다지만 그래도 기차역과 버스터미널마다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분주히 발길을 재촉하는 귀성객들로 북적일 것이다. 퍽퍽한 삶에다 꽉 막힌 고향길이 고달프지만 설렘이 가득하다. 아이들은 세뱃돈으로 두둑해질 주머니를 기대하며 설렐 것이고, 어른들은 잠시나마 시름을 잊고 고향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렐 것이다. 찾아갈 곳이 있고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자체만으로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벌써 정겨운 고향 그림이 펼쳐진다. 아픈 곳이 늘어나는 어머니, 아버지는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자식들을 반갑게 맞는다. 발길 뜸해 한적했던 마을도 왁자한 웃음꽃으로 피어난다. 내 고향 뒷담에 든든히 버티고 선 감나무도 오버랩된다. 시인 김남주가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이라고 읊었던 그런 감나무다. 하늘 끝에 걸린 빨간 홍시 두어 개를 품고 까치와 놀던 감나무는 추억에 서린 나를 반갑게 맞아줄 것이다. 앙상하지만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가지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말이다. 어린 시절 한없이 커 보였던 감나무, 어느새 훌쩍 늙어버린 모습이지만 그래도 정겹고 반갑다. ‘어서 오라’는 노목(老木)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힘들거나 지칠 때 노목은 안식처이자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그런 존재다. ‘마당가 감나무 꼭대기를 비추는 햇살/ 그 햇살 쬐고 앉은 까치 한 마리/ 깍, 깍, 깍, 깍/ 꽁지 까닥이며 깃을 털 때마다/ 떨어지는 발간 햇살부스러기들/ 깃털 무늬 아롱진 축복의 씨앗들/ 까치와 새해인사를 나누려는지/ 설빔을 차려입은 한 아이/ 방문을 열고 뛰어 나가본다.’(최진연 ‘설날 아침’) 어느새 훌쩍 커버렸지만 이번 설 아침에는 그때의 눈으로 감나무를 올려 보련다. 아련한 이런 추억에 젖고자 고달픈 길이지만 너도나도 고향으로 향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민족 대이동에 끼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갈수록 바늘구멍이 돼 가고 있는 취업 전선을 뚫기 위해 여념 없는 젊은이들, 먹고살기 어려워지고 있다며 한탄하는 자영업자들, 가족 해체로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독거노인들…. 지난해 ‘쉬었음’ 인구가 역대 최대를 기록해 처음으로 200만명을 넘어섰다는 암울한 뉴스도 들린다. ‘쉬었음’ 인구는 일할 능력이 있지만 병원 치료나 육아, 가사 등 구체적인 이유 없이 막연히 쉬고 싶어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15~19세 2만9000명, 20대 33만2000명, 30대 21만3000명, 40대 22만3000명이고 50대는 42만6000명에 달한다. 실업자로도 분류되지 않는데 실업 상태로 전락하거나 아예 구직을 포기할 가능성이 큰 이들이다. 이들에게 명절은 또 다른 외로움으로 다가온다. 고향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그런 곳일 게다. 타향에서 쓸쓸히 바라만 봐야 하는 이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미국 하버드대 연구팀이 79년간 724명의 삶을 추적 연구한 결과 행복한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주위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조화라고 발표한 적이 있다. 연구에 따르면 삶을 가장 윤택하게 만드는 것은 좋은 인간관계고,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외로움이다. 가족과 친구, 공동체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다는 것이다. 외로움은 독이라며 SNS 등을 줄이고 대면 접촉을 늘려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스마트기기에 중독돼 혼자서만 지내는 것에 익숙해지고 타인보다는 나만 고집하는 세태에 시사하는 바 크다. 설 연휴만이라도 나보다는 타인과 이웃을 배려하는 넉넉함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잠시나마 시름을 잊고 웃음꽃이 피어나는 고향의 풍성함을 느껴보자. 그래서인지 설은 힐링의 시간이지만 주위를 돌아보는 사색의 시간이라고도 하는지 모르겠다.

‘설날 아침 맛있는 떡국 한 그릇을 먹으며/ 덩달아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 나무로 치자면 나이테 한 줄이 더 그어지는 셈이다/ ~ / 나이가 들어간다고 겁내거나 허둥대지 말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좋은 사람 쪽으로 변화하면서/ 내가 먹는 나이에 어울리는 모양으로 살도록 하자.’(정연복 ‘설날 떡국’)

김준동 공공정책국장 겸 논설위원 jd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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