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서만은 나잇값을 떳떳하게 하고 싶다”

국민일보

“글에서만은 나잇값을 떳떳하게 하고 싶다”

[책과 길]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 박완서 지음, 작가정신, 208쪽 1만4000원

입력 2020-01-23 17:08
담낭암으로 투병하다가 2011년 1월 22일 세상을 등진 소설가 박완서. 1931년 개성 외곽 지역인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의 상처를 되짚고 시대의 아픔을 드러내면서 서민들의 삶을 담아낸 작품들을 통해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국민일보DB

“여태껏 쓴 작품 가운데 어떤 것을 가장 좋아하시나요.”

소설가 박완서(1931~2011)는 저런 질문을 받을 때면 망설임 없이 데뷔작인 ‘나목’(1970)을 꼽곤 했다. 그는 나목을 읽을 때마다 애틋함을 느낀다고, 눈시울을 적신다고 털어놓았다. “늙은 작가”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궁상과 비참의 극치”라고 생각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박완서는 1990년 나목을 재출간하면서 “치졸하게 느껴지는 부분을 한번 크게 고쳐 써보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재출간된 나목의 발문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목을 생각할 때마다 괜히 애틋해지곤 한다. …출판사와 (재출간을) 약속한 기한을 1년여나 더 끌면서도 최소한도로밖에 손을 못 본 것은 게으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역시 애틋함 때문이었다.”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에는 이렇듯 박완서가 발표한 작품에 실린 ‘작가의 말’ 67편이 가지런하게 담겨 있다. 박완서의 딸인 호원숙 작가는 작가의 말을 “어머니 문학으로 들어가는 열쇠”처럼 여겼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박완서는 작품에 미처 못 담은 이야기, 집필 동기, 역사적 배경을 부연한 내용 등을 작가의 말에 실었다. 신산했던 시대를 통과하면서 느낀 것들을 적어놓기도 했다. 예컨대 82년 ‘오만과 몽상’을 내놓을 땐 “그들이 오만의 시기를 넘기고 겸허를 얻기를”이라고 썼다. 2000년 ‘아주 오래된 농담’을 발표할 적엔 “돈에 대해서 말한다는 게 여성의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게 돼버린 것도 독자가 눈여겨봐 주었으면 한다”고 적었다.

각종 문학상을 받았을 때 써내려갔던 수상 연설문도 곳곳에 등장한다. 박완서는 ‘엄마의 말뚝 2’가 이상문학상 수상작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흠칫 놀라면서 부끄러웠고, 피하고 싶었고, 숨어버리고도 싶었다”고 한다. 이런 감정을 느낀 이유는 이 작품이 “쓴 것을 후회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참았어야 하는 것을, 정 못 참겠으면 울안에서의 통곡, 통곡으로 끝냈어야 하는 것을…. 저는 그 작품이 활자가 되어 돌아다니는 동안 줄창 이렇게 불편했고 불안했습니다.”

박완서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그를 사랑한 많은 독자는 작가가 남긴 작품만을 읽고 또 읽으며 그리움을 달래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글이 발표될 수 없으니 묘한 갈증을 느낀 이들이 적잖을 터. 이런 상황에서 ‘프롤로그 에필로그…’는 박완서의 팬들에게 그가 만든 문학 세계의 새로운 지점을 발견케 만드는 이색적인 신간이라고 할 수 있다. 첫머리에 등장하는 소설가 정이현의 표현처럼 글들이 하나같이 박완서의 생전 모습과 꼭 닮았다는 느낌도 받게 된다. 정이현은 이렇게 적었다. “각 장의 말미마다 겸손하게 반복되는 ‘깊이 감사드립니다’를 읽고 또 읽는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하다. 더 이상 어떤 질문도 드릴 수 없겠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완서 선생님이 여기에 계신 듯 책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박완서는 한때 문학평론가 김윤식이 서문만을 엮어 발표했던 책을 좋아했다고 한다. 만약 여태 그가 살아 있었더라도 ‘프롤로그 에필로그…’ 같은 책을 내놨을 수도 있는 셈이다. 마지막 ‘작가의 말’은 2010년 출간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 실려 있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 주었다. 또한 노후에 흙을 주무를 수 있는 마당이 있는 집에 산다는 것도 큰 복이다. …늙어 보인다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고, 누가 나를 젊게 봐준 날은 온종일 기분이 좋은 평범한 늙은이지만 글에서만은 나잇값을 떳떳하게 하고 싶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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