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왜 더 큰 곳간을 짓나

국민일보

[바이블시론] 왜 더 큰 곳간을 짓나

조정민 베이직교회 목사

입력 2020-01-24 04:03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 중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께 부탁을 드립니다. “선생님, 내 형에게 제발 아버지 유산을 저와 공평하게 나누라고 얘기 좀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반응은 싸늘합니다. “나는 너희 재판장이 아니다. 나는 너희들 재산 나누는 사람이 아니다.” 따르던 무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모든 탐심을 물리쳐라. 생명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예수님께 부탁 잘못 드렸다가 큰 무안을 당한 사건입니다

사실 당시 관행으로는 랍비에게 이런 종류의 청을 하는 것은 무례하거나 뜻밖의 요구가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못할 기도가 없듯이 무슨 일이건 일단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태도가 그리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불의와 정의의 기준 뒤에 숨겨진 무엇인가를 드러내시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우리 안에 깊숙이 숨어 있는 탐심의 뿌리에서 자라는 것임을 일러주시고자 다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한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밭에 풍년이 들었습니다. 수확물이 너무 많아서 곳간이 좁습니다. “그래. 하는 수 없다. 곳간이 작으니 더 큰 곳간을 짓자. 재산을 전부 거기 쌓고 여생 좀 편안하게 누리자.”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구나! 오늘 밤 네가 죽으면 곳간 가득한 네 재산이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네 곳간을 네 자아로 채우면 이렇게 된다.”

유산 제대로 나눠달라는 것과 부자의 곳간 이야기는 대체 어떻게 연결되는 것입니까?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것과 더 큰 욕심을 내는 일은 대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면 그 뿌리가 별개가 아니라 얽혀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 누군가 주장하는 정의가 깊이 들여다보면 사적인 이익의 동기가 공공의 이익으로 포장된 것입니까? 또 얼마나 많은 경우 그렇게 포장된 논리를 다수의 분노 에너지에 실어 고무풍선처럼 부풀려놓습니까? 세상을 뒤흔드는 소요 뒤에 감춰진 것이 고작 한 인간의 탐심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아마도 세상은 더 큰 충격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속일 수 있더라도 예수님을 속일 방법은 없습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속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 있는 방도는 없습니다. 유산 분배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다른 이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간 것이 문제입니다. 그는 이 문제를 정의와 불의의 문제로 제기한 반면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필요와 탐욕의 문제로 바꿔놓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적어도 진리를 따르는 무리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그리고 영생의 가치를 최우선에 두기로 결단했다면 재물과 하나님 가운데 택일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탐욕은 언제나 더 큰 곳간을 짓는 논리를 정당화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곳곳에서 더 큰 곳간을 짓는 공사의 소음으로 진동합니다. 모든 기업은 영구 성장이 목표입니다. 해마다 더 큰 곳간을 늘려 짓는 것이 꿈입니다. 기업만입니까? 병원이나 대학이나 NGO는 안 그렇습니까? 정치는 어떻습니까? 더 큰 권력을 장악하고자 혈안입니다. 선거 때 더 많은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아무리 큰 곳간을 짓자고 해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또 어떻습니까? 더 많은 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이유로 더 큰 곳간을 짓는 일은 언제 어디서나 장려할 만한 일로 여깁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더 큰 기쁨과 더 많은 자유와 더 풍성한 선행이 이뤄지고 있습니까? 혹시 더 큰 곳간이 오히려 더 큰 탐욕을 부추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더 크게 지은 곳간이 무너져 대형 참사로 이어지는 일은 없습니까? 혹시 더 큰 곳간 지어놓고 다툼만 일삼다가 엉뚱한 데 다 빼앗기지 않았습니까?

조정민 베이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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