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오늘밤 눈이 푹푹 내리면

국민일보

[세상만사] 오늘밤 눈이 푹푹 내리면

박지훈 문화부 차장

입력 2020-01-24 04:04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던 3년 전 어느 날이었다. 수습기자 필기시험을 출제하라는 지시를 받고 문제를 만들기 위해 서울의 한 호텔에서 1박2일간 선배들과 합숙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내가 만든 문제 중 하나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관련된 것이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 눈이 나린다’라는 1연을 제시한 뒤 공란에 들어갈 단어를 묻는 문제였다. 정답은 ‘푹푹’이었는데 당시 얼마나 많은 수험생이 문제를 맞혔는지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다만 문제를 내면서 염두에 뒀던 출제 의도는 명확했다. 단순히 백석의 시를 암송하는지 확인하려고 저런 문제를 낸 건 아니었다. 백석이 저 멀리 평북 정주에서 나고 자란 북방의 시인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 정도의 상식만 갖췄다면, 보기에 제시한 ‘펄펄’이나 ‘펑펑’보다는 ‘푹푹’을 고를 거라고 생각했다. 백석은 그야말로 눈이 ‘푹푹’ 내리는 북한 어느 마을의 질박한 이야기를 시에 담아내던 대표적인 재북 작가였으니까 말이다.

해마다 겨울이 찾아오면 ‘나와 나타샤와…’를 찾아 읽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것이다. 이 시는 백석과 그의 연인 자야 사이의 러브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 때 OST의 주제곡으로 삼을 만한 작품이다. 때는 1930년대 말, 그러니까 겨우 20대이던 백석과 자야 사이의 로맨스는 다른 남녀 간의 만남이 그렇듯 쉽게 달아올랐고 자주 휘청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백석이 부모의 강요로 다른 여자에게 장가를 들자 자야는 심하게 토라졌다. 백석을 피해 서울 청진동으로 숨었는데, 백석은 수소문 끝에 자야의 집을 알아내 수틀린 연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를 썼고, 해후한 두 사람은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하지만 이튿날 백석은 자야를 두고 함흥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자야에게 누런 미농지 봉투를 내밀었는데 여기에 ‘나와 나타샤와…’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아마도 사랑의 가없는 기쁨을 이토록 선명하게 그려낸 절창은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다. 시인 안도현은 ‘백석 평전’에서 ‘나와 나타샤와…’를 이렇게 평가했다. “첫눈이 내리는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백석 이후에 이미 죽은 문장이 되고 말았다.”

한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와 나타샤와…’의 1연은 인과 관계에 어긋나는 문장으로 이어져 있다. 1연을 개괄하자면 ‘나는 가난하다→나는 나타샤를 사랑한다→그래서 오늘밤 푹푹 눈이 내린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는데, 누군가를 사랑하니 눈이 내린다는 건 누가 보더라도 궤변일 따름이다. 하지만 이렇게 충돌하는 문장이 묘한 여백을 창조해내면서 ‘나와 나타샤와…’를 각별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즉, 누군가를 일구월심으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면 하늘에서 푹푹 눈이 내릴 수도 있다는 게 백석이 남긴 메시지인 셈이다.

실제로 눈은 신비로운 존재다. 김애란의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주인공의 엄마는 언젠가 현미경으로 찍은 눈 결정 모양을 본 적이 있다면서 “그게 참 이상했는데”라고 말한다. 이유는 눈의 결정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엄마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뭐 하러 그렇게 아름답냐. 어차피 눈에 보이지도 않고 땅에 닿자마자 금방 사라질 텐데.” 객쩍은 해석처럼 들리겠지만, 백석의 시를 떠올려본다면 눈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하늘이 선사하는 사랑의 결정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설 연휴 기간 일부 지역에서는 눈이 내릴 거라고 한다. 도로가 빙판길이 되면 귀경길이나 귀성길이 힘들어질 수도 있을 텐데, 혹시라도 주차장처럼 변한 도로 위에서 눈송이를 마주한다면 이런 상상이라도 해보시길. 눈송이에는 누군가의 사랑이 깃들어 있다고, 그 사랑에 공감하면서 어디선가 흰 당나귀도 응앙응앙 울고 있을 거라고.

박지훈 문화부 차장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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