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교인 증명서, 통행 가능한 신분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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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교인 증명서, 통행 가능한 신분증이었다

입력 2020-02-11 00:01 수정 2020-02-1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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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8월 1일 발급된 영락교회 교인증명서의 앞면. 교인의 이름과 발급일, 영락교회 교인을 증명한다는 내용과 교회 직인이 보인다. 오른쪽은 증명서 뒷면 모습. 아래에 한경직 목사의 친필 사인이 있다.

서울 영락교회(김운성 목사)가 1952년 8월 1일 발행한 교인증명서는 가로 8㎝, 세로 12.5㎝ 크기로 휴대하기에 편해 보였다. 앞면에는 ‘영락교회 교인임을 증명한다’는 내용과 교회 직인이 찍혀 있다. 당시 교회는 부산으로 피난을 간 상태였지만, 증명서에는 ‘서울특별시 중구 져동 2가 69번지’라는 주소를 당시 맞춤법으로 기록했다. 한경직 목사가 세운 서울 영락교회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뒷면에는 앞면의 내용이 영어로 수록돼 있고 맨 아래 한 목사의 친필 사인도 들어 있다.

이 증명서는 주근원 사모에게 발급된 것이다. 주 사모는 영락교회 농아인부를 맡았던 박윤삼 목사의 부인이다. 김성보 영락교회 은퇴 안수집사는 10일 주 사모의 사연과 함께 교인등록증을 국민일보에 공개했다.

전쟁 당시 교회들은 교인들의 안전을 위해 자체적으로 교인증명서를 발급했다. 이런 증명서는 68년 주민등록증이 발급된 후 자취를 감췄다. 그동안 일부 교회의 교인증명서가 공개된 일은 있지만, 발급 목적과 용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경우는 드물다.

주 사모는 한강을 건너기 위해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전쟁 중 국군과 유엔군은 민간인들의 한강 도강을 통제했다. 관계기관으로부터 사전 허가를 받거나 공신력 있는 신분증 없이 도강을 시도하다 잡히면 재판에 넘겨지곤 했다.

서울 중심부로의 빨치산 유입이나 종북 인사의 월북 시도, 불순분자의 남하를 막으려는 조치였다. 신분을 증명하기 어렵던 시절, 교인증명서가 신분증으로 활용된 셈이었다.

6·25전쟁사를 전공한 군사편찬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52년 7월 한국후방관구사령부가 만들어진 이후 후방과 전방을 더욱 철저하게 분리하면서 한강 통행이 어려워졌다”면서 “한강도 전후방을 가르는 경계 중 하나로 도강하려면 반드시 신분증이 필요했고 없으면 고초를 겪었다”고 했다. 그는 “52년 8월 1일 발행된 영락교회 교인증명서도 한강을 건널 때 요긴하게 사용됐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주 사모가 한강을 건넌 이유는 영락교회 재건 작업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김 집사는 “전쟁 중 부산으로 피난 갔던 영락교회는 서울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적지 않은 교인을 서울로 파견했다”면서 “영락교회 1호 장로인 고 송성찬 장로가 대표적인 교회 재건 요원 중 한 명이었다”고 전했다.

김성보 영락교회 은퇴 안수집사가 10일 영락교회에서 교회 설립 초기 사료를 돋보기로 보고 있다.

그는 “주 사모는 전쟁 발발 직후 제주로 가 제주영락교회를 설립한 박 목사를 대신해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교회와 농아인부 재건에 참여했다”며 “한 목사도 이를 위해 교인증명서를 발급해 줬다”고 했다. 재건을 준비하던 교회는 휴전 3개월 후인 53년 10월 서울로 돌아왔다.

김 집사는 49년 영락교회 대학생면려회가 발행했던 교회 요람도 공개했다. 대학생면려회는 지금의 대학부를 말한다. 가로 6㎝, 세로 9㎝ 크기의 요람에는 영락교회 초창기 교인들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훗날 장로가 된 김치선 대학생면려회 회장이나 50년 9월 교회를 지키다 순교한 김응락 장로, 그의 아들인 김영걸 포항공대 명예교수 등의 이름이 눈길을 끈다.

이치만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역사가 오래된 교회 중 연구 가치가 큰 사료를 갖고도 가치를 모른 채 내버려 두는 경우가 많다”면서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격변기에 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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