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사물에 새긴 약속

국민일보

[너섬情談] 사물에 새긴 약속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입력 2020-02-12 04:01

박물관을 좋아해 틈날 때마다 찾는다. 외국 여행에서도 박물관엔 꼭 들른다. 다른 이유는 없다. 박물관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가득한데, 볼수록 사랑스럽고 알수록 감탄이 솟는 까닭이다. 주제를 정해 관련한 책들을 쌓아놓고 읽는 공부를 때때로 부추긴다.

요즈음에는 수천 년 동안 땅속에 있다 인간 세계로 돌아온 청동 유물에 관심이 많아졌다. 지난 몇 해 사이에 베이징 항저우 상하이 타이베이 등의 박물관에서 이름난 유물들을 접한 덕분일 것이다. 유리 너머 푸르게 빛나는 청동기물들은 거칠고 과감한 투박함과 우아하고 장엄한 아름다움이 한데 어울려 있다. 모양은 정교하고 문양은 섬세해서 위엄이 있고도 자연스럽다.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것은 모양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망치도, 가위도, 칼도, 종도, 나팔도, 그릇도, 물병도… 처음 마련된 대로다. 토기나 석기는 자연에 의존하고, 청동기는 토기에 기대며, 철기나 도기나 자기는 청동기를 닮는다. 새로운 것은 오래된 것을 모방하되 당대의 기술과 솜씨로 세련됨을 이룩함으로써 편리함과 아름다움을 탄생시킨다. 장식하는 문양조차 다르지 않다. 현대의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구름이 넘실대고, 풀꽃이 일어서고, 나비가 춤추고, 동물이 달리고, 신성한 눈동자가 쏘아본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물건들이 속삭인다. 세상에는 부박한 유행을 넘어서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니 시간 속에 흩어져 사라질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에 삶을 투자하라.

그래서 유물은 때때로 글들을 품고 있다. 동아시아의 전통 서사 양식 중 하나로, 명(銘)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명은 ‘사물에 새긴 약속’이다. 청동 같은 튼튼한 재질로 만들어진 귀한 물건은 수천 년을 우리 곁에 있다. 인간의 짤따란 수명을 생각하면 영원이나 다름없다. 말은 덧없이 사라진다. 이야기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청동 물건에 새긴 글자는 영원히 바꿀 수 없다. 신의 목소리나 마찬가지다.

약속하고 당부하고 경계하는 말들을 물건에 새겨 곁에 둠으로써 사람들은 시간의 무참한 흐름에도 결코 없어지지 않을 거룩한 깨달음을 전하려 했다. 상나라 탕왕은 세숫대야에 “날마다 새로워져라. 또 날마다 새로워져라(日新又日新)”라고 새김으로써 이러한 전통을 수립했다고 전한다.

청동기의 명(銘)을 이어받아 동아시아의 선비들은 물건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명을 지어 물건에 쓰거나 새김으로써 물건의 뜻을 성찰하고 쓰임을 살펴 자신을 바루는 계기로 삼았다. 물건을 들일 때 평생 추구할 만한 것을 다짐하고, 물건을 쓸 때마다 그 약속을 떠올림으로써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바꾸어 가려고 했다.

조선 중기 유학자 임성주는 창을 낸 후 명을 적었다. “기력을 다했다 말하지 말고 생각을 어질게 하며, 의로움을 돈독히 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한 숨결조차도 게으르지 말라.” 신독(愼獨)이다. 혼자 있는 방 안에서조차 수양에 게으르지 않을 것을 창을 볼 때마다 다짐한 것이다. 고려 말 문인 이첨은 자를 마련한 후 새겼다. “너의 반듯함을 내가 형님으로 삼고, 너의 곧음을 내가 덕으로 삼는다.” 책상 필통에 자를 넣어 두고 꺼내 쓸 때마다 반듯함과 곧음을 따져 살아간다. 어찌 흐트러짐이 있겠는가.

명을 새김으로써 일상의 흔한 사물조차 거룩한 물건으로 변용된다. 영원한 가치를 담았으니 저절로 아껴서 대물림할 물건이 된다. 인간은 물건을 만들고 물건은 인간을 바꾼다. 인간과 물건이 서로를 더 나은 존재로 공진화시키는 것이다. 오늘의 삶은 이와 반대다. 무심히 쓰고 버리는 사이에 쓰레기는 쌓이고, 인간은 사물의 반격을 받아 쓰레기 속에서 질식하는 중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마저 소모해 버림으로써 쓰레기가 되어 버린 삶을 곳곳에서 쏟아 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은 전혀 아닐 것이다. 주변 사물에 명을 적어 삶의 가치를 되새기는 일, 새로운 삶을 위한 한 걸음을 이로부터 시작해 볼까 싶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