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의 인사이트] 주의 종, 세상의 종

국민일보

[이명희의 인사이트] 주의 종, 세상의 종

입력 2020-02-15 04:02

믿음은 약하지만 모태신앙인지라 어렸을 때부터 내 주변에는 목사님들이 많았다. 중학교 때까지 다니던 시골 교회의 목사님은 친구 아버지셨고 외가 쪽으로는 강원도에 사시는 이모부, 대전에 사시는 작은외할아버지가 모두 목사님이셨다. 부모님은 손아래 이모부에게도 항상 ‘권 목사님’ 하면서 깍듯하게 대접했다. 이모 아들 둘은 강원도를 떠나 청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엄마는 학창시절 도시락을 싸줬던 아들뻘 되는 조카들이 모두 목회자가 돼서 찾아왔을 때도 ‘우리 목사님’ 하면서 극진히 모셨다.

아버지가 매달 월급을 타면 가장 먼저 고기 한 근을 사다 드리며 섬겼던 지방의 목사님은 내가 기자가 되자 누구보다 꼼꼼하게 내 글을 읽어주신 애독자셨다. 1990년대 초 지방에서 처음 교회를 취재하러 갔을 때 촌지를 건네려던 목사님을 보며 충격을 받은 기억도 난다.

지난주 캐나다에서 한국에 잠시 다니러 온 목사님 한 분을 만났다. 예전 직장을 그만둔 뒤 한 번도 못 봤으니 20년 만이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현장을 누비며 IMF 구제금융을 생중계로 발표하는 경제부총리에게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지던 열혈 기자였다. 다혈질이고 성격도 급했다. 그런 그가 내 앞에 온순한 주님의 종이 돼서 나타났다. 그 선배가 들려준 간증이다. 기자를 그만두고 중국으로 사업하러 떠났던 그는 처참한 실패를 맛봤다. 빌딩 사무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살을 생각했는데 그 순간 ‘내가 죽으면 이곳 베이징에 있는 특파원들의 절반이 나를 알 텐데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선데이크리스천이었지만 무교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아버지학교에 갔다가 하나님을 만났다. 구약의 마지막 권인 말라기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안 오셨더라면 어떻게 될 뻔 했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곁에서 듣고 있던 부인이 이제는 예수님이 믿어지느냐고 했다.

그 후 연수를 갔던 캐나다로 이주해서 사업하려던 그는 사기를 당하고 집까지 날려버렸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그는 금식기도를 하며 하나님한테 매달렸다. 어느 순간 그의 목을 꽉 조여오는 힘을 밀쳐내고 누군가 자신을 보호하고 감싸 안는 것이 느껴지더란다. “잘난 척하면서 살아왔는데 하나님이 여지없이 무너뜨리시더라.” 자녀들을 불러놓고 목회자의 길을 가겠노라 했더니 목사의 아들, 딸로 살고 싶지 않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다. 캐나다 영주권을 얻어 밴쿠버에서 목회를 하는 그는 언젠가는 북한에 선교하러 갈 거라고 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봐온 주의 종은 세상인과는 다른 고귀하고 구별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택하시고 그 부름에 거역하면 K선배처럼 채찍질하고 담금질해서라도 기필코 종을 삼으신다. 어둡고 험한 이 세상에 등대 같은 그들이 있기에 위로받으며 실족하지 않는 것일 터.

그러나 요즘엔 주의 종이 아니라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는 목회자들이 많이 보인다. 목사들을 호위무사처럼 우르르 대동하고 다니는 목회자가 있는가 하면 광장으로 나가 정치하는 목사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정당을 만들어 직접 정치를 하겠다며 뛰어든 목사도 있다.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고 화합에 나서야 할 목회자들이 갈등의 중심에 서 있다.

최근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0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68%가 목사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63.9%는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목회자와 한국교회의 위상이 땅에 떨어지고 기독교인의 도덕과 윤리가 처참하게 무너진 현실을 보여준다. 성경은 말한다.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라기 4장 1절)

이명희 종교국 부국장 m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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