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여! 그대 안에 ‘새로운 사회’가 있는가

국민일보

혁명가여! 그대 안에 ‘새로운 사회’가 있는가

[책과 길] 혁명노트 / 김규항 지음, 알마, 256쪽, 1만4400원

입력 2020-02-13 20:59
한 시민이 ‘저항하라’라는 의미가 담긴 피켓을 들고 서 있다. 저 사람이 꿈꾸는 것은 혁명일까. 혁명은 실현 가능한 일일까. 김규항은 신작 ‘혁명노트’에서 성공한 혁명의 대표적 사례로 ‘미투 혁명’을 꼽았다. “미투는 한 개의 정부를 무너트리지도 새로운 국가를 세우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단위를 아우르는 근본적 변화를 만들어냈다. 혁명은 비정상적인 것의 정상화가 아니라 ‘정상성’ 자체의 변화다.” 게티이미지뱅크

김규항(58·사진)은 지난달 24일 블로그에 영화 ‘기생충’을 다룬 짤막한 글을 올렸다. 그는 영화를 보면서 “얼마간의 불쾌감”을 느꼈다고 했다.

이유는 가난을 다루는 영화의 태도가 마뜩잖아서였다. 김규항은 “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을 대상화하여 제 작품을 만들 때 유일하게 윤리적인 방법은 빈곤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에 맞서는 일”이라고 적었다. “기생충은 빈곤 상태에 있지 않거나 빈곤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의 일원인 사람들이 아무런 불편이나 책임감 없이 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냄새 맡고 가지고 놀게(수익, 명예, 행사, 파티 등) 해준다. 피시의 본디 의미를 존중하는 전제에서 말하자면, 기생충은 서구 피시충들이 애완하기 맞춤한 영화다.”

여기서 피시(PC)는 정치적 올바름을 뜻하는 ‘폴리티컬 코렉트니스(Political Correctness)’의 준말이다. 혐오나 차별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사회운동으로, 한없이 옳은 말처럼 들리지만 진보 엘리트의 위선을 꼬집는 키워드로 활용될 때가 많다. 김규항도 최근 내놓은 ‘혁명노트’에 “(피시는) 실제 행동과 책임을 바른 말로 때우는 위선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써놓았다.



삐딱하지만 반듯한 김규항의 세계

자,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김규항의 기생충 논평에 고개를 끄덕일까. 현재 대한민국에서 그가 써내는 저런 글은 껄끄럽게만 여겨질 것이다. 그럼에도 저 글부터 소개한 이유는 기생충 논평에서도 김규항의 평소 모습이 그대로 묻어나서다. 김규항은 지난 20여년간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삐딱한 태도로 제일 가지런한 글을 써온 일급의 논객이었다. 하지만 명성과 달리 그는 과작(寡作)의 저술가였다. 각종 매체에 발표한 칼럼 혹은 토막글을 엮은 책, 인터뷰집에 등장한 사례 등을 제외하면 2009년 발표한 ‘예수전’이 그의 이름이 내걸린 유일한 작품이다. 즉, 혁명노트는 김규항이 ‘예수전’ 이후 작정하고 펴낸 11년 만의 신작이자 두 번째 책인 셈이다.

혁명노트에는 10개 챕터에 걸쳐 짤막한 글 총 119개가 담겨 있다. 제목을 비튼다면 지식인 김규항의 치열한 공부 흔적이 담긴 ‘요점노트’로 봐도 무방하다. 과거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생각이 “예수에서 출발해서 마르크스로 보완했다”고 말한 적 있는데, 책을 읽으면 그 뜻을 가늠하게 된다. 사람들이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을 오독하거나 허투루 보고 넘기는 대목은 무엇인지를 조목조목 짚은 내용이 간단없이 이어진다.

자본주의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물신성(물신 숭배)의 힘을 다룬 대목이 대표적이다. 과거부터 지배계급이 노예를 부리려면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예컨대 과거에는 주인과 노예는 다른 인간이라는 환상이 그런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바로 물신성이다. 물신성은 “자본주의가 지속하는 근본적 힘”이며 “피지배계급과 지배계급을 막론하고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본주의적 환상”이다. “계급사회로서 자본주의의 특별함은 지배계급이 주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일한 주인은 자본, 즉 물신이다. 지배계급은 물신의 명령과 의지를 따라 제 역할을 수행하는 ‘지배계급 역할을 맡은 노예’일 뿐이다.”

혁명노트는 본문과 각주가 2인3각 경기를 하듯 보조하면서 천천히 전진하는 구성을 띠고 있다. 얼마간 뭉툭하고 막연하게 느껴지는 본문의 글을 각주가 보완하는 형태다. 가령 ‘(28)’이라는 숫자가 붙은 글에는 “다수 인민의 이해에 기반을 둔 정치세력이 정치권력을 획득하여 거대 기업들을 인민의 이해에 맞게 ‘재사회화’한다면 (중략) 새로운 사회로 이행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다. 막연하게 느껴지는 주장인데 이 글을 부연하는 각주를 읽으면 사정은 달라진다. “예컨대 한국의 주요한 거대 독점기업(재벌)의 최대 주주는 대부분 국민연금이다. …제도 정치에서 좌파 지분이 일정 수준 이상이라면 재벌이 총수 일가의 사적 이익을 위해 경영되는 일은 억지할 수 있다.”

혁명은 가능한가

세상의 가장자리를 살피려는 김규항의 글은 언제나 우직했다. SNS에 올리는 글도 항상 정갈했으며 아름다웠다. 김규항의 짧은 글을 묶은 책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2017)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세상은 ‘청년 시절에나 하는 운동’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일생에 걸쳐 지속되는 신념들로 바뀐다.” 혁명노트를 읽으면 김규항이 지닌 신념의 무늬를 확인하게 된다.

제목에서 짐작하다시피 혁명노트 속 이야기는 결국 혁명이 가능한가를 묻는 쪽으로 뻗어나간다. 김규항은 물신성을 극복하는 데 발판이 돼야 하는 인문학이나 예술이 별무소용의 존재가 돼버린 현실을 꼬집는다. 현실과 동떨어져 “지식 과잉” 상태로 살아가는 지식인을 비판한다. “마르크스주의가 물신세계의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파산하는 모습”까지 그려낸다. 그러면서 “혁명만이 근본적 변화를 만들며, 혁명의 기색이 없는 사회엔 개혁도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하에선 언제나 같다”고 강조한다.

이쯤 되면 이런 질문이 등장해야 할 것이다. 혁명으로 세워질 “새로운 사회”는 어때야 하나. 책에 담긴 내용을 간추리자면 이렇다. 새로운 사회에서 노동의 귀천은 해체되거나 뒤집힌다. 청소 노동은 “가장 존경받는 노동”이고, 투자 전문가나 부자만을 위해 복무하는 대형 로펌 변호사의 일은 “가장 천한 노동”이다. 변화를 이끄는 힘은 “질문의 재개”다. 예컨대 우리는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AI가 할 수 있는 “인간 고유의 영역을 찾아야 한다”는 “가련한 다짐”을 반복하기 전에 “AI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부터 던져야 한다.

독자들은 혁명노트의 끄트머리에 가서야 김규항이 혁명을 위해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내 안에 새로운 사회가 있는가?” ‘둥근 사각형’처럼 형용모순의 소개가 되겠지만, 혁명노트는 얇지만 두꺼운 책이면서 짧지만 빨리 읽을 수 없는 역작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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