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피해망상

국민일보

[가리사니] 피해망상

정현수 이슈·탐사팀 기자

입력 2020-02-17 04:06

한국갤럽이 지난 14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가 흥미롭다. 18세 이상 1001명에게 물었더니 ‘현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야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는 응답(45%)이 ‘현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여당 후보가 많이 당선돼야 한다’는 응답(43%)을 처음으로 넘어섰다고 한다. 물론 두 의견의 격차가 오차범위 내이긴 하지만 지난해 4~6월과 지난 1월 실시된 4차례 조사에서 항상 ‘지원론’이 ‘견제론’을 10% 포인트 이상 앞섰던 점을 고려하면 유의미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요컨대 더 많은 국민이 현 정부와 여당을 ‘견제가 필요한 권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더불어민주당과 정부의 최근 행보와 관련이 있을 테다. 사실 현 정권의 열성 지지자들을 제외한 대부분 진보·중도 성향의 국민은 정부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명을 강행할 때부터 고개를 갸우뚱하기 시작했다. 사모펀드 비리와 자녀 입시 비리, 증거 조작·인멸까지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터져 나왔지만 정권은 ‘일단 고(Go)’를 외쳤다. 조 전 장관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개혁을 막으려는 저항이고, 밝혀진 혐의들은 검찰 개혁이라는 대의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란 논리를 댔다. 조 전 장관에게 드리워진 의혹만으로도 당연히 ‘낙마감’이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정권의 호소에 일말의 진정성이 느껴졌던 듯싶다.

지난 1월 여론조사에서도 현 정권을 ‘힘을 실어줘야 할 대상’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부·여당의 독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임명하며 “살아 있는 권력도 수사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 명을 받은 검찰이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을 수사하며 칼끝을 청와대로 돌리자 새로 임명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그 명을 수행하던 검사들을 다른 자리로 발령을 내 버렸다.

심지어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해당 사건 공소장 공개마저 거부했다. ‘개인의 명예와 사생활 침해’를 막아야 한다는 이유는 군색하기만 하다. “단순히 알권리보다 조금 있다가 알아도 될 권리도 있을 것 같다”는 말이 판사 출신에 5선 의원까지 지낸 추 장관 입에서 흘러나왔을 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일련의 사건들을 보고 있자면 현 정부가 일종의 ‘피해망상’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도 든다. 지금 정부·여당은 독선에 대해 주변(심지어 진보시민단체에서도)에서 쏟아지는 정당한 지적과 우려를 개혁에 저항하는 기득권의 부당한 공격·박해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러니 정권을 향한 수사를 검찰의 반동쯤으로 여기고, 수사를 받는 정권 실세들을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개인으로 둔갑시켜 버린다.

지난 3년을 지나오면서 오히려 현 정권이 기득권이 돼 버린 것 아니냐는 성찰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정권의 독선과 오만을 비판한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의 칼럼에 고발로 응수한 것은 이런 망상의 정점이다.

“과했다”며 고발을 취하하는 그 순간까지도 민주당은 진정성 있는 사과조차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임 교수가 과거 ‘안철수 캠프’에 몸담았던 이력을 제시하며 그를 ‘저쪽 편’으로 규정하는 ‘뒤끝’을 보였다.

정치부에 오래 몸담았던 회사 선배는 민심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그건 거대한 강줄기 같아서 물길 바닥에 돌 몇 개 쌓인다고 방향이 바로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그 돌들이 쌓이고 쌓여서 물길이 막히고 방향이 확 돌아서면 절대 원래 길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이제 두 달 남은 4·15 총선을 앞두고 정권은 또다시 ‘촛불혁명 완수를 위해 힘을 실어달라’는 구호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국민은 이미 여당·정부를 ‘힘을 실어줘야 할 대상’이 아닌 ‘견제가 필요한 권력’으로 보기 시작했다. 저 강 아래 차곡차곡 쌓여가는 돌들이 물길을 틀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을 정권이 가지길 바란다.

정현수 이슈·탐사팀 기자 jukebox@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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