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탐사] 버거운 가장의 무게… 두 번 사고를 겪고도 다시 헬멧을 썼다

국민일보

[이슈&탐사] 버거운 가장의 무게… 두 번 사고를 겪고도 다시 헬멧을 썼다

플랫폼에 빨려들어간 철수씨 ① 선택지 없는 아빠들

입력 2020-02-17 00:00
플랫폼 배달대행 업체 ‘배달의민족’에서 라이더로 일하는 김홍식(47)씨가 지난 12일 비오는 서울시내 한 골목길을 오토바이를 타고 내려가고 있다. 최현규 기자

배달 플랫폼 노동자 르포르타주 취재
실직·창업실패…갈 곳 없는 4050
하루 10~11시간 주 6일 장시간 노동
플랫폼에 생계 기댄 노동자들


플랫폼 경제 역시 전통 방식의 노동을 원료로 굴러간다.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 주문을 안방까지 연결해 주는 건 기계가 아닌 노동자다. 그래서 플랫폼은 실제 몸을 움직이는 노동자가 없으면 기차 없이 레일만 깔린 승강장일 뿐이다.

그 노동자 수가 54만명에 달한다는 추정이 나왔다. 실제로는 더 많을 거라는 예측이 많다. 플랫폼이 생기기 전부터 같은 일을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수평 이동을 했다고 가정해도 신규 진입한 사람 수가 상당하다는 의미다.

최근에는 플랫폼에 휩쓸려 들어온 노동자들이 급증하면서 노동 가치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일자리가 일감으로 쪼개지고 부스러진 현장에서 노동자들끼리 다시 단가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플랫폼 경제가 거스를 수 없는 현상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배달원 대부분은 전용 플랫폼 앱을 이용해 수입을 얻고 있어 대표적 플랫폼 노동자로 꼽힌다. 국민일보는 노동자들이 배달 플랫폼으로 이동하는 경로와 이유를 분석하고, 그들의 일상을 추적해 대안을 모색해 봤다.

그들은 어디서 온 누구일까

경기 침체로 식당이 망하고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는 등 일자리를 잃었던 경험은 플랫폼 노동자들 사이에서 흔한 일이었다. 공장이나 중소기업에 다녔는데 아무리 일해도 빈곤을 벗어날 수 없어 뛰쳐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플랫폼에 몸을 던진 청년 중에는 반복된 취업 실패를 토로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새로 진입한 사람들 중에는 가장인 40, 50대가 많았다. 생계를 책임져야 해서 이들 대부분은 이 일이 전업이었다. 하루 10~11시간, 목표치 40~50콜을 채우는 삶을 주 6일 지속한다.

플랫폼에 온전히 생계를 기댄 노동자들은 평범한 일상이 아득했다. 아등바등 살아 생활비를 대는 숨막히는 하루의 반복이다. 돌봐줄 사람이 없어 자녀를 지방의 노모에게 맡기고 도심을 누비는 라이더는 그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울었다. 짊어진 책임의 무게가 큰 사람은 더 자신을 갈아 넣었다. 며칠 휴가라도 내려면 그 전후 노동 강도를 더 높여야 했다. 부모 병원비를 내려다 수개월을 휴일 없이 일한 라이더는 최근 뇌출혈로 쓰러졌다. 일자리가 아닌 일감으로 가족을 건사하는 삶은 위태로웠다.

그러나 플랫폼 시스템에서는 ‘쥐어짜는 노동’을 강제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렇게 일하라고 지시하지 않았으니 책임을 통감하거나 걱정하는 사람도 없다. 노동자 스스로의 선택으로만 여긴다.

‘조리시간 3분’.

서울 강서구의 한 교차로에서 신호대기 중이던 김홍식(가명·47)씨는 지난해 10월 31일 오후 2시쯤 휴대전화에 뜬 콜을 잡았다. 콜에는 고객이 주문한 자장면을 받으러 식당까지 가야 하는 시간이 함께 표시된다. 픽업이 늦어지면 배달 완료 목표 시간에 쫓긴다. 늦은 배달로 불만 신고가 들어오면 돈을 날린다. 그래서 콜은 심장박동을 재촉한다.

빨간색 정지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자마자 시속 60㎞로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그 순간 반대편 차로에서 신호대기하던 SUV 차량이 갑자기 불법 유턴을 했다. 브레이크를 잡더라도 충돌 전엔 멈춰설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대론 죽겠구나.’ 김씨는 4년 전 햄버거 프랜차이즈 업체에서 배달 일을 하다 겪었던 사고가 그때 떠올랐다. 당시에는 오토바이가 미끄러지며 갈비뼈 2대가 부러졌었다. 미끄러져 차 밑으로 빨려들어가면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들을 꺾어 몸으로 부딪히는 게 살 길이라는 걸 직감했다. 4년 동안 배달 일을 하면서 체득한 본능 같았다. 핸들을 옆으로 꺾었고 그렇게 몸 왼편이 차량 조수석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헬멧 밖 풍경이 3초가량 멈춘 듯했다. 굉음에 놀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고 차량 운전자가 구급차를 부르는 동안 김씨는 배달의민족 관제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사고가 났네요. 지금 잡은 중국집 픽업은 못 가겠어요.” 전화를 끊자 통증이 몰려왔고 그제야 다친 걸 실감했다고 그는 말했다. 갈비뼈 6대가 부러졌다.


홍식씨를 찾는 건 배달 일뿐이었다

처음부터 라이더가 되려던 건 아니었다. 김씨는 월 200만원 정도 받는 공단(公團)에 다녔었다. 나이가 차도 월급이 늘어나는 속도는 더뎠다. 노부모까지 여섯 식구를 부양하는 일은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버거워졌다. 경제적 문제로 갈등을 겪다 아내와 헤어졌고, 5년 전에는 회사를 나왔다.

‘장사를 해야겠다.’ 오랜 꿈이 고개를 들었다. 퇴직금과 모아둔 돈을 더해 장어집을 차렸다. 마련할 수 있는 식당은 33㎡(10평) 정도의 작은 가게였다. 그런데 내수경기 침체가 발목을 잡았다. 딱 1년 버티는 동안 15년 회사생활로 모아둔 돈 전부를 날렸다.

‘본인은 15년 동안 ○○공단에서 전기·관리직으로 근무했고….’ 다시 구직에 나섰다. 전기 설비를 손보는 기술직군에서 일을 했었고 관리직군 경험도 있어서 이전과 비슷한 수준의 직장은 쉽게 구할 줄 알았다. 이력서를 수십 군데 보냈는데 답은 없었다. 불황 여파로 일자리도 줄어들 때였다.

책임져야 할 곳이 많은 40대의 나이는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직종을 가리지 않고 건물 관리까지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냈다. 그러나 마흔 줄인 그를 선뜻 뽑아주는 곳은 없었다. 기다리다 받은 유일한 연락이 배달 일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경기도에 있는 부모님 댁에 맡기고 난생 처음 오토바이를 몰았다. 맥도날드 배달 일을 하면서 첫 번째 교통사고를 겪었고, 동네 피자가게로 자리를 옮겼을 때도 사고 위기는 수시로 찾아왔다. 그렇게 2년을 일하다 다시 구직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김씨는 2018년 5월 배달의민족 라이더로 다시 오토바이에 올랐다. “고민 끝에 ‘배달 일은 정말 못 하겠다’며 나왔는데 나를 찾아주는 곳은 배달밖에 없었어요.”

가장의 무게

그는 넉 달 전 사고로 한 달을 꼬박 병원에 누워 있었다. 몸이 회복되는 속도보다 마음이 회복되는 속도가 더뎌 한 달을 더 쉬었다. ‘다시 핸들을 잡을 수 있을까.’ 그 생각만 하면 땀이 나고 손이 떨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하루에도 수십번씩 스스로에게 묻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김씨는 지난달 다시 일터로 나왔다.

“지금도 사고 났던 부위가 아파요. 아찔했던 순간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죠. 제가 갖고 있는 기술이든 경력이든 뭐든 갖고 이력서를 계속 냈는데, 나이 때문인지 아무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더라고요. 이력서 내면서 보니 제 나이가 참 애매해요. 그래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가족에게는 사고 사실을 숨기고 “일이 바빠서 못 간다”는 핑계를 댔다.

부양의 책임이 그를 채근한 듯싶었다. 기름값, 밥값, 월세, 대출로 100만원가량을 쓰고 나머지는 김씨 아이들을 맡고 있는 노부모에게 보낸다. 70대 노부모는 그 돈으로 손주와 생활한다. 그나마 차상위계층인 부모님이 지원받는 돈이 있어 다행이다. 그 돈마저 없었다면 김씨는 그만큼 일을 더 해야 한다. 돈을 벌 수 있는 건 혼자라서 ‘더 오래, 더 빨리’ 달려야 한다.

하고 싶을 때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다는 플랫폼 경제의 장밋빛 캐치프레이즈는 김씨처럼 라이더가 전업인 가장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 같았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생활의 균형)이 가능하다는 선전은 적어도 김씨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다.

김씨는 콜이 가장 많은 저녁시간 서울 도심을 달린 뒤 자정 무렵 집으로 가 소주 한두 잔 반주 삼아 라면으로 늦은 저녁을 때우는 일이 많다. 그는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40만원 하는 빌라에서 혼자 지내며 1주일에 하루 쉬는 날을 기다린다. 그날엔 무조건 아이들을 보러 간다고 했다.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이 보고 싶다고 전화하면 나도 그렇다고 하고, 좀만 기다리라고 그러죠. 자리가 좀 잡혀야 하는데….” 사고 이야기를 할 때도 덤덤했던 그였는데, 아이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열심히 사는데 아이들을 보지 못한다는 한탄인 듯했다.

김씨는 그렇게 번 돈으로 아이 태권도학원 하나를 얼마 전 끊어줬다. 최근 휴일 아이는 아빠 앞에서 발차기 품새를 보였다. 같이 살지 못해도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몸으로 때우면 어떻게든 돈이 벌리는 구조가 그에게는 다행이다.

이슈&탐사팀=전웅빈 김유나 정현수 김판 임주언 기자 im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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