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기생충, 전문가와 낙하산

국민일보

[뉴스룸에서] 기생충, 전문가와 낙하산

장지영 국제부 차장

입력 2020-02-19 04:08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는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수상에 대해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아카데미상 시상식 직후 쓰여진 이 칼럼은 봉준호 감독, 배우 송강호,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등 기생충을 만든 주역들이 한국의 이전 정권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랐었다면서 블랙리스트가 계속됐으면 기생충은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WP는 특히 “기생충은 자유로운 사회가 예술에 얼마나 중요한가란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봉 감독도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수상 후 프랑스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듯 블랙리스트는 한국의 예술가들을 깊은 트라우마에 잠기게 한 악몽 같은 사건이었다.

그런데 기생충은 예술에서 창작의 자유뿐만 아니라 전문가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기생충의 놀라운 성공은 봉 감독만이 아니라 배우, 스태프, 홍보마케팅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제 몫을 한 덕분이다. 사실 높은 제작비가 투입되는 영화는 흥행이 매우 중요하다. 관객이 찾는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한 전문성이 중시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한국에서 또 다른 예술 분야인 공연은 영화와 달리 전문성이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경제학자 윌리엄 보몰과 윌리엄 보웬이 1966년 공저 ‘공연예술의 경제적 딜레마’에서 지적했듯 공연은 노동집약적인 서비스다. 영화도 노동집약적이긴 하지만 라이브가 특징인 공연과 달리 필름을 대량으로 복사할 수 있다. 한마디로 영화는 한번 제작되면 공산품처럼 대량생산이 가능하다. 이에 비해 공연은 대량생산이 불가능한 데다 인건비의 꾸준한 상승 때문에 가격이 비싸질 수밖에 없다. 공연이 만성적인 ‘비용 질병’에 빠지게 된다는 보몰과 보웬의 지적은 공연에 대한 공적 지원의 근거가 됐다.

영화와 달리 공적 지원에 의존적인 공연에서는 ‘전문성’보다 ‘공공성’이 늘 화두로 언급된다.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만큼 소수 상류층의 향유물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예술의 대중화’를 모토로 일반 대중도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정책이 펼쳐지고 있다. 한국 역시 문화예술 복지가 강조되고 있다. 취지 자체는 올바르지만 문화예술 복지가 무료 공연 등의 이벤트나 아마추어의 생활 예술로 편중되고 있는 것은 문제다.

게다가 공연계는 장르의 성격상 영화계보다 시스템이 복잡하고 국제적 네트워킹이 폐쇄적이다. 한국 예술가를 알리기 위해 오랜 협업과 교류가 필수적이지만 현재 한국 상황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 공연계는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영화, K팝, 드라마와 달리 예전보다 더 퇴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된 데는 공공으로 운영되는 문화예술 기관에 전문가들이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공공극장의 경우 제작과 유통의 중심 역할을 해야만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곳조차 국제적 수준과 거리가 멀다. 정부나 지자체가 비전문가 기관장을 꽂는 경우가 허다하다보니 제대로 운영되지 못한 탓이다. 이런 비전문가 낙하산은 소위 진보나 보수 상관없이 공통적이지만 문재인정부 들어서 극에 달한 듯하다.

이들 인사는 문화예술 기관의 기본적 역할을 소홀히 한다. 입으로는 공공성을 외치지만 아는 게 없기 때문에 포퓰리즘 이벤트를 남발할 뿐이다. 게다가 문화예술 기관에서 잠깐 근무한 경력을 앞세워 전문가인 척한다. 이들 때문에 공연계로 대표되는 허약한 문화예술 생태계는 더욱 허약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블랙리스트가 문화예술계에 끼친 폐해가 엄청나지만 무능한 비전문가 낙하산이 끼치는 폐해도 그에 못지않다.

장지영 국제부 차장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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