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티 테이블] ‘미스터 트롯’ 열세 살의 희망가

국민일보

[이지현의 티 테이블] ‘미스터 트롯’ 열세 살의 희망가

입력 2020-02-22 04:01

요즘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머릿속에 트로트 음악이 맴돈다. 이상한 일이다. 평소 트로트 음악을 즐겨 듣지 않고, 불러본 적도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난 13일 방송된 ‘내일은 미스터 트롯’ 본선에 출연한 열세 살 소년 때문이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정동원군이 세상을 초연한 듯한 얼굴로 ‘희망가’를 불렀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란 가사를 들으며 ‘저 나이에 노랫말의 의미를 알까?’ 싶었지만, 소년의 슬픈 음률은 금세 많은 시청자를 눈물에 젖게 했다. 또 ‘이 아이도 성장해 가장이 되고 노인이 되겠지’ ‘바람과 먼지가 가득한 이 풍진(風塵) 세상을 살기 위해 칼바람을 견뎌야 하는 날도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사람들의 호응이 그토록 뜨거웠던 이유는 ‘집단적 공감’과 ‘연대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헤어져 조부모 손에 자란 정군은 할아버지에게 노래를 배웠다. 전국에서 열리는 경연대회도 할아버지 손을 잡고 나갔다. 그런 할아버지가 최근 병으로 돌아가셨다. 대중은 이런 개인적 슬픔에 공감했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됐다. 부디 희망가로 세상에 말을 거는 소년에게 이 세상이 바람과 먼지로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 아니라 살만한 세상이라고 화답해주고 싶다.

방송 후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은 희망가의 원곡은 19세기 미국에서 불리던 흑인영가 ‘the lord into his garden comes’이다. 이 노래는 1890년대에 일본에서 먼저 번안곡으로 나왔고 한국엔 1910년대 기독교 신자 임학천이 ‘이 풍진 세월’이란 제목으로 노랫말을 붙였고, 1920년대에 민요 가수 박채선·이류색이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소원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를 담은 흑인 영가처럼 이 노래에도 나라 잃은 백성들의 설움과 어두운 현실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담겼다. 희망가는 노예 생활 속에서도, 일제 암흑기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꿈을 포기하지 않던 민중이 불렀던 노래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지금 세상은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풍진의 세상이다. 사람들은 사람을 피한다. 모이기도 주저한다. 경기도 침체됐다. 너나 할 것 없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런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준다면 좋겠다. 집단적 공감과 연대의식으로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지난달 27일 오후 8시 중국 우한 시내 곳곳에서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둠이 짙게 깔린 중국 우한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누군가 “짜요!”(힘내자)라고 외친다. 여기저기 주민들이 이 구호를 따라 외쳤다. “우한 짜요! 우한 짜요!” 세상과 단절된 생활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 서로를 향해 외치는 응원의 메시지였다. 도시 봉쇄령으로 외부와 격리된 채 불안한 생활을 하는 중국 우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서로를 격려하는 ‘아파트 메아리’ 영상은 한때 트위터를 뜨겁게 달궜다. 아파트에 격리된 한 시민이 “27일 밤 8시 창문을 열고 노래를 부르자”고 SNS에 제안하며 이런 격려의 메아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남극의 펭귄은 집단적 체온 나누기로 혹한을 버틴다. 영하 45도에 이르는 혹한과 초속 50m의 강풍 속에서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쪽을 행해 고개를 숙인 채 기왓장처럼 몸을 붙인다. 무리 안의 온도는 20도에 이르고 때론 37.5도까지 치솟는다. 우리도 펭귄처럼 집단적 체온 나누기로 혹한을 버텨내야 한다.

희망가의 가사대로 부귀영화는 일장춘몽과 같고, 세상의 일들은 쉽게 잊히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세상만사를 잊으면 행복할 수 있을까.

로렌스 티르노의 시 ‘잠 못 이루는 사람들’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새벽 두 시, 세 시, 또는 네 시가 넘도록/ 잠 못 이루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들의 집을 나와 공원으로 간다면/ 만일 백 명, 천 명, 또는 수만 명의 사람이/ 하나의 물결처럼 공원에 모여/ 각자에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세상은 더 아름다운 곳이 될까/ 사람들은 더 멋진 삶을 살게 될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더 멋진 삶을 살게 될 거라고 미스터 트롯, 열세 살 소년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지현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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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