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구 칼럼] 깨어있는 시민정신에 박수를

국민일보

[김의구 칼럼] 깨어있는 시민정신에 박수를

입력 2020-02-26 04:01

코로나19 사태 확산 속 ‘착한 건물주 운동’, 의료인 헌신 같은 시민 행동도 개화
자신과 이웃까지 지키겠다는 공동체 정신, 위기를 기회로 승화해 우리 사회 성숙시킬 것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자 서울 남대문시장에서는 임대료를 낮추거나 동결하는 건물주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손님이 격감해 매출이 줄어든 입주 상인들의 고통을 나눠 지겠다는 것이다. 3개월간 임대료를 20% 정도 인하하는 이 행렬은 지난 3일부터 시작돼 최근까지 4명이 동참했다. 덕분에 어깨가 다소나마 가벼워진 상인은 2000명에 이른다. 지방자치단체가 가세해 본격적으로 이런 운동을 시작한 곳은 전주 한옥마을이다. 김승수 전주시장과 한옥마을 건물주 14명이 지난 12일 만나 코로나19 사태 극복을 위해 최소 3개월 이상 10%가 넘는 임대료를 깎기로 하는 상생 선언식을 가졌다. 이후 전주 시내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착한 건물주 운동’이라고 명명한 이 훈훈한 미담에는 24일 현재 전국 23개 전통시장 임대인 140여명이 동참해 2000개 점포의 임대료가 인하 또는 동결됐다. 부산의 대표적 카페 밀집지인 전포카페거리에서도 임대료를 20~60% 인하하는 운동이 시작됐고 광주의 1913송정역시장 건물주 25명은 이미 5개월가량 임대료를 10% 낮추기로 결정했다. 대구의 대표적 전통시장인 서문시장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고 한다.

비단 임대료뿐 아니다. 감염병특별관리지역인 대구와 경북 청도에는 전국에서 시민과 단체들의 따뜻한 격려가 쏟아지고 있다. 이랜드그룹은 방역물품 및 생필품 지원에 사용해 달라며 10억원을 대구시에 전달했다. 신한금융그룹과 미르치과병원은 보건용 마스크 1만6000개를, 부산상공회의소는 5000개를 지원했다. DGB대구은행은 대구시 외에 경북도에도 5억원을 기탁했다. 기부 대열에는 배우 이영애씨와 박서준씨, 방송인 장성규씨 등도 동참했다. 대구시 공식 소셜미디어 계정에는 ‘#힘내요 DAEGU’ 등의 해시태그를 단 전국 누리꾼들의 응원이 쇄도하고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모으는 것은 대구와 경북으로 달려간 다른 지역 의료인들의 헌신이다. 의료인으로서의 소명의식에 따라 자유의지로 바이러스와의 전장에 뛰어든 이들은 악조건 속에서 눈물겨운 분투를 벌이고 있다. 이런 여러 사례는 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치면서 시민들의 자구 노력과 연대 움직임도 자연 발생적으로 개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20여년 전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을 연상시키는 발군의 시민정신이 아닐 수 없다.

시민들의 깨어있는 행동은 감염병 발생 초기는 물론이고 확산기에 더욱 중요하다. 전염 범위가 넓어지고 감염자들이 속출하는 상황에서는 시민 개개인의 예방수칙 준수가 확산을 방지하는 데 매우 긴요하다. 불필요한 대인 접촉을 절제하는 일상생활을 하고 자신의 상태를 잘 지켜보다 이상이 있으면 곧바로 방역 당국에 알리는 일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서울의 대형 교회인 소망교회가 주일예배를 중단하면서 “사회 공동체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산하 인우교회는 주일예배와 성경공부 등을 모두 중단하면서 “코로나19가 한창 유행일 때는 서로 감염되지 않는 게 이웃을 위한 사랑이라고 본다”고 강조했다. 모두 깨어있는 시민정신이 표출된 것이다. 개인적인 수칙을 지키는 데서 더 나아가 확진자나 유행 지역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질병과의 싸움을 서로 격려하는 것은 바이러스에 짓눌린 우울한 이때 희망과 신뢰의 빛을 던지는 일이다.

착한 건물주 운동은 코로나 사태에서 시작됐지만 사태 종식이 종착점은 아니다. 사태 후에도 임대료 상승으로 기존 상권이 밀려나가는 젠트리피케이션 같은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 근본적 갈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겠다는 지역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본다면 코로나 사태는 위기이지만 동시에 기회가 되고, 발전의 계기로 승화될 수 있는 셈이다. 임대료 외 다른 선한 움직임들도 마찬가지다. 위기 속에서 발현된 시민 의식과 공동체 정신은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키는 모멘텀이 될 수 있다.

1940년 페스트가 창궐한 북아프리카 항구도시 오랑을 무대로 한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는 고립된 공간에서 재앙에 맞서 싸우는 의사와 평범한 시민들을 그렸다. 갑자기 찾아온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맞서는 인간의 모습은 소설 속 장면만은 아니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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