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공화정이죠, 지킬 수만 있다면”

국민일보

[여의도포럼] “공화정이죠, 지킬 수만 있다면”

박재완 성균관대 교수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입력 2020-02-27 04:01

21대 총선이 4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총선은 헌법(제1조 제2항)이 규정한 주권재민(主權在民) 원칙이 적용되는 핵심 절차다. 널리 오해되는 것과 달리 위 조문(‘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의 뿌리는 민주정보다 공화정에 더 가깝다.

공화정은 권력이 1인에게 집중되고 세습되는 군주정(君主政)과 대척된다. 공화정에선 국민이 정통성의 유일한 원천이며, 오직 국민만 정부 형태를 결정할 수 있다. 공화정은 고대 로마나 그리스 도시국가, 중세 유럽의 무역도시 등에서도 제한적으로 시도되긴 했다. 하지만 현대적 맥락의 공화정은 1776년 독립을 선언한 미국의 1787년 제헌 헌법으로 처음 도입됐다. 미국에서 ‘헌법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제임스 매디슨(제4대 대통령)은 갓 태어난 연방의 정체(政體)를 “모든 권력이 국민 공동체에서 나오는 공화정”으로 못 박았다. 이에 따라 1789년 조지 워싱턴(초대 대통령)은 인류 최초로 국민이 뽑아 임기가 정해진 국가원수로 취임했다.

군주정을 대체한 공화정은 문명 진화의 산물이다. 다만 헌법에 명시됐다고 공화정의 작동이 절로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수립된 공화정은 공포정치와 쿠데타 등으로 75년 동안 표류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출범한 소련 공화정도 철권통치로 몸살을 앓다 끝내 해체됐다. 이를 예견한 듯 ‘최초의 미국인’으로 불리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남긴 명언은 곱씹어 볼 만하다. 1787년 제헌 회의가 끝나자 독립기념관 계단에서 기다리던 군중 가운데 필라델피아 시장 부인 엘리자베스 파월 여사가 물었다. “공화정이에요, 군주정이에요?” 프랭클린은 “공화정이죠, 당신들이 지킬 수만 있다면”이라고 짧게 답했다.

프랭클린의 전제처럼 공화정의 유지는 쉬운 일이 아니다. 선출직은 물론 유권자에게도 엄중한 책무가 따른다. 무엇보다도 공화정은 민주정과 길항(拮抗) 관계에 놓인다. 민주정의 요체는 평등한 시민권에 기초한 다수결인데, 다수가 연대해 소수의 권리를 침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은 투표권이 없는 미래 세대가 그 전형적인 희생양이다. 한때 잘나가던 그리스와 베네수엘라 경제만 해도 질투심과 탐욕을 부추긴 선동가에 휘둘리다 파탄에 이르지 않았는가. 선심 정책을 편 위정자 탓이 크지만, 다수의 횡포에 편승해 눈앞 사익만 좇은 유권자 책임도 작지 않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런 폭민(暴民)·중우(衆愚)정치의 위험을 경계했다. 존 애덤스(제2대 대통령)는 “지금껏 자살하지 않은 민주정은 없다”라고 기술할 정도였다. 미국 헌법이 민주정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매디슨은 헌법이 기본권을 보호하는 허술한 ‘종이 장벽’에 그치지 않도록 ‘깨어있는 국민’의 헌신과 공민교육을 강조했다. 위정자는 물론 유권자도 공공의식(사심 없는 공동체 걱정)과 절제(경청·존중·선의·인내·양보·관용)의 덕성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만 숙의·설득을 거쳐 원만한 합의에 이를 수 있다. 헌법이 공화정의 필요조건이라면, 이를 가꾸어나가는 개개인의 덕성은 충분조건인 셈이다.

다른 나라 얘기가 장황해졌다. 요컨대 헌법정신을 올곧게 구현하려면 우리도 공화정이 정착되도록 힘써야 한다. 민주정에만 매달리면 다수의 횡포를 견제하기 어렵다. 자칫 인기영합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권위주의, 나아가 책임을 물을 대상도 없는 대중독재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민주정에선 발 빠르게 대응할 수는 있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실수하기도 쉽다. 반면에 공화정에선 선거주기의 숙려기간이 있기에 더 멀리 내다보고 차분히 결정할 수 있다.

총선은 우리의 ‘집합적 자각’ 수준을 시험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선거전이 본격화되면 감성을 자극하는 편 가르기가 힘을 얻고, 날림공약과 ‘묻지 마’ 처방도 쏟아질 것이다. 번거로워도 ‘충실한 반대’나 복잡한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공민의식이 절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격정에 호소하는 악화(惡貨)가 지적 교감이 긴요한 양화(良貨)를 몰아내는 덫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유처럼 선출직이 플루트를 부는 사람이라면, 플루트를 만드는 사람은 유권자다. 잘못 만든 플루트가 제소리를 낼 리가 없다. 공화정의 성패는 결국 ‘깨어있는 유권자’가 가름한다. 다가오는 4월 15일 다수의 횡포를 걸러내는 진중한 선택이 중요한 이유다.

박재완 성균관대 교수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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