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코로나 시대의 육아

국민일보

[세상만사] 코로나 시대의 육아

박지훈 문화스포츠레저부 차장

입력 2020-03-13 04:04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아기를 맡아주던 어린이집이 문을 닫다니, 그것도 당장 내일부터 각 가정에서 육아를 도맡아야 한다니, 그야말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맞벌이 부부인 우리는 대책을 세워야 했다. 회사에선 재택근무를 허락해주었다. 그러나 20개월 된 아기를 보면서 일을 하기가 쉬울 리 없었다. 집에서 애를 보면서 기사를 쓰려면 치밀한 작전이 필요했다. 아이는 노트북이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치고 밟고 던지려 했다. 아이의 시선이 닿지 않는 싱크대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틈틈이 일을 했다. 아이가 낮잠을 자면 급하게 기사를 마무리했고, 밤잠에 들면 다음 날 업무 일부를 미리 해놓았다.

궁즉통이라더니 친가와 처가 부모님이 얼마간 아이를 맡아주기도 했다. 아이를 잠시 돌봐주겠노라는 양가 부모님의 전화가 왔을 때는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기분이었다. 그렇게 아이는 지난 몇 주간 저글링 묘기에 동원된 공처럼 이곳저곳을 오가며 ‘코로나 시대’를 보냈다. 현재로서는 어린이집이 언제 다시 문을 열지 알 수 없다. 이미 한 차례 개원을 연기한 적이 있어서다. 우리 가족은 언제쯤 이 시간을 통과해 과거와 같은 일상을 보낼 수 있을까.

사실 어린이집 휴원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느낀 감정은 당혹감이 아닌 짜증이었다. 시스템이 무너진 자리에 이번에도 가족만 남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코로나 시대는 가족 단위의 각자도생 시스템이 여전히 한국 사회의 유일한 안전망이라는 점을 되새기게 해줬다. “믿을 건 가족뿐”이라거나 “힘들 때 기댈 곳은 가족밖에 없다”는 말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유효한 명제였다.

지구촌 상당수 국가는 근대화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 가족의 힘은 시들해지고 그 자리를 개인주의가 대체했다. 한데 한국은 예외였다. 사회 안전망에 구멍이 숭숭 뚫린 탓인지 국민들은 사적 안전망인 가족을 지고의 가치로 삼는 가족주의를 맹신했다. 현재도 많은 부모는 자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증명하려 한다. 가족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은 적으로 여긴다. 미혼모가정이나 다문화가정처럼 ‘정상가족’ 범주에서 벗어난 이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가족이 모든 짐을 걸머지는 독박의 구조는 간병 문제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현재 가정에서 돌봄을 받는 환자는 약 100만명으로 추산된다). “늙고 아프면 가족밖에 없다”는 인식 탓인지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이나 업체는 가족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식의 슬로건을 내건다. 한국 사회의 돌봄 문제를 살핀 신간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에는 “가족은 답이 아니라 문제”라면서 이런 주문이 적혀 있다. “우리에겐 ‘가족 같은 관계’라는 비유를 넘어서 신뢰와 돌봄이 오가는 인간관계의 새로운 양식이 필요하다. … 이데올로기로서의 가족의 해체를 고민해야 한다.” 이런 주장은 사실 많은 사람이 했던 말이기도 하다. 가령 김희경 여성가족부 차관은 저서 ‘이상한 정상가족’에서 가족주의에서 벗어나 “삶은 개인주의적으로 살고, 해법은 집단주의적으로” 찾자고 썼다. 실제로 가족주의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가 백년하청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진행된 한 설문조사를 보면 맞벌이 부부 가운데 90% 이상이 코로나 사태 이후 ‘육아 공백’을 경험했다. 아마 지금 이 순간도 이들은, 그리고 이들의 늙은 부모는 코로나 시대의 육아 해법을 찾느라 골몰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주말 아이를 재운 뒤 정세랑의 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를 읽다가 이런 대목에 밑줄을 그었다. “인생이 테트리스라면, 더 이상 긴 일자 막대는 내려오지 않는다. 갑자기 모든 게 좋아질 리가 없다. 이렇게 쌓여서, 해소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안고 버티는 거다.”

박지훈 문화스포츠레저부 차장 lucidfall@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