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한 미술] 슬럼화된 ‘파쇼 건축’은 어떻게 21세기 문화유산이 되었나

국민일보

[궁금한 미술] 슬럼화된 ‘파쇼 건축’은 어떻게 21세기 문화유산이 되었나

⑥ 세운상가와 건축가 김수근

입력 2020-03-21 04:03
지난 16일 서울의 청계천에서 을지로 사이의 공중보행로에서 내려다본 세운상가. 연말까지 을지로에서 퇴계로까지의 2단계 구간이 완공되면 종묘에서 남산까지 걸으면서 도심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권현구 기자

“시비(是非) 속에 번창하는 실내 골프장/ 기대했던 의원 손님보단 주부, 학생 많고.”

제목만 보면 얼핏 골프가 한국 사회에 대중화되기 시작한 1990년대 뉴스라는 생각이 든다. 놀랍게도 1970년 10월 모 일간지에서 서울의 신풍속도 관련해 다룬 것이다. 기사는 한국의 1호 주상복합아파트인 세운상가가 건설된 지 3주년에 즈음해 이 기획물을 연재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이던 1967년 11월부터 1970년 5월에 걸쳐 차례로 완공된 세운상가는 대한민국 건축의 ‘좌절된 유토피아’였다.

세운상가는 종로-청계천-을지로-퇴계로에 이르는 서울 도심의 남북축 1㎞에 8∼17층 높이의 4개 건물군에 현대상가, 세운가동상가, 청계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풍전호텔, 신성상가, 진양상가 등 8개 상가가 들어선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였다. 1735개 점포에 726가구가 거주했다.

세운상가는 그 시절 ‘서울의 핫 플레이스’였다. “동양 최대의 주상아파트 건물 안에 교회에서 호텔, 골프장까지 갖춘” 최고급 주거 단지였다. 우리나라 아파트론 처음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바둑천재’ 조치훈의 바둑 살롱, 골프장과 볼링장, 목욕탕과 슈퍼마켓도 갖췄다. 당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형제들 같은 재력가, 남진 윤복희 등 유명 연예인과 정치인들이 살았다.

한국 1호 주상복합… 좌절된 유토피아

상가로서도 대기업보다 먼저 조립형 PC를 만들어 팔았던 전기·전자업종의 메카였다. 세운상가에 가면 로켓도 만든다는 속설이 돌 정도였다.

1970년대 세운상가 항공사진. 이충기 교수 제공

초등학교 때 세운상가 아파트 입주민이었다는 건축가 박민철 시간향건축사무소 소장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때 북한 인사들이 서울에 왔다. 서울의 화려함을 과시하려고 시에서 세운상가 아파트 전체에 야간에 불을 밝히라고 한 적 있다. 시민들이 야경을 보려고 남산에 올라가 구경하며 떠들썩했다”고 회상했다.

세운상가는 ‘역발상적’이다. 조선 시대 한양의 도시 조직은 남쪽을 향하는 궁궐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시가지 건축물들이 청계천을 중심으로 물길 따라 동서 방향으로 조성돼 있다. 세운상가는 이런 흐름에 역행해 도심을 횡단하듯 생겨났다. 한때는 서울을 동서로 나누는 콘크리트 벽이라는 오명을 들었다.

연원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던 1941년, 일제는 미국의 소이탄 공습에 따른 가공할 화재 위험에 대비해 도로와 공원 등 대규모 소개 공지를 조성했다. 그중 하나가 폭 50m 세운상가 부지였다. 해방 이후엔 무허가 판잣집이 들어섰다. 종로구 쪽에는 이른바 ‘종삼’이라고 불리는 최대 규모 사창가가 형성됐다.

건축가 김수근. 이충기 교수 제공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 박정희는 정치적 지배 명분을 얻기 위해 조국 근대화의 상징적 성과물이 필요했다. 세운상가는 그런 치적을 위한 랜드마크로 지어졌다. 정권의 2인자 김종필을 통해 김현옥 서울시장과 친분이 있던 건축가 김수근이 일을 맡게 됐다. 당시 김수근연구소와 합병해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에서 일하던 윤승중 건축가는 이렇게 회고한다.

“1966년 어느 날, (서울) 시장에게 꽤 신용이 있었던 김수근 선생에게 시장이 문제의 땅 이용을 물어왔을 때 김수근이 즉석에서 보행자 몰, 보행자 데크, 입체 도시 등의 개념을 꽤 그럴듯한 말로 설명하고 공감을 얻어내서 프로젝트화 했다. 최초의 스케치를 만들어야 하는 시간은 단 며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통령 박정희의 근대화 열망, ‘불도저 시장’ 김현옥의 추진력, 건축가 김수근의 실험 정신. 이 3박자가 합쳐져 나온 것이 세운상가다. 무엇보다 8개 상가에 이르는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가 1년여 만에 뚝딱 가능했다는 점에서 “박정희 정권하에서나 가능했던 ‘파쇼 건축’”이라고 서울시립대 이충기 교수는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2차 대전 이후 서구 건축계에서는 폐허를 딛고 빨리 회복하기 위해 복합시설이 인기 있었는데, 세운상가는 그런 경향을 발 빠르게 수용한 것”이라고 봤다. 한마디로 트렌디했던 것이다. 세운상가의 특징 중 하나인 공중보행로는 르 코르뷔지에의 ‘유니테 다비타시옹’, 스미슨 부부의 ‘골든 레인 주거단지’ 등에서 표현된 공중 가로 개념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두호 건축가는 전한다.

설계 초기에는 1·2층은 자동차 전용 공간으로 길과 주차장으로 내주고 3층부터 사람들이 다니도록 한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당시 서울에 차가 2만 대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1990년대에나 나왔어야 할 건물을 1960년대 말에 앞서 지은 셈’이었던 것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이동연 교수는 “현실적 필요를 고려하지 않은 과잉 욕망의 건축물”이라고 깎아내렸다.

21세기의 복덩이가 될 수 있을까

‘대한민국 1%의 왕국’ ‘최첨단 산업의 메카’였던 세운상가는 어쩌다 도시의 흉물로 전락하게 됐을까. 우선 박정희 정권의 안보 불안에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겠다. 세운상가가 건설된 이듬해인 1968년 1월 북한의 미국 푸에블로호 납치, 특수부대 무장 게릴라들의 청와대 습격(김신조 사건) 등 북한의 도발 사건이 거듭 일어났다. 강북은 더는 안전한 곳이 못 됐다. 유사시를 대비해 남산터널이 뚫리게 됐고, 강남 개발이 본격화됐다. 1970년대 들어 강남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세운상가는 주거시설로서 매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신세계 백화점, 미도파 백화점, 롯데백화점이 개관하며 서울의 중심 상권도 종로에서 명동으로 옮겨졌다.

세운상가는 1987년 용산전자상가가 설립되면서 치명타를 입었다. 상권이 약화되고 거주 계층이 변화하면서 아파트는 점차 영세한 회사의 사무실로 전락했다. 주변은 슬럼화됐다.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인 2006년 세운상가는 사망 선고를 받았다. 세운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돼 철거와 재개발이 결정된 것이다. 이어진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복잡한 소유권 문제 등이 얽혀 재개발은 지연되고 운명은 바뀌었다. 2009년 현대상가가 철거됐을 뿐 나머지 7개 상가는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시 재생의 기호로 상징되며 부활을 꿈꾸는 중이다. 현 박원순 시장이 들어서며 2014년 존치가 결정된 것이다. 서울시는 최근 세운상가 주변 상권에 대해서도 ‘도심 제조 산업 허브’로 키우겠다고 밝히며 개발보다는 재생에 방점을 찍었다.

세운상가 옥상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종묘. 권현구 기자

슬럼화는 역설적으로 21세기에 자산이 됐다. 첫째 슬럼화된 덕분에 일제강점기부터 60·70년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는 세운상가의 역사성이 보존될 수 있었다. 둘째는 관광자원으로서의 공중보행로가 갖는 매력이 있다. 서울시는 종묘∼을지로 1단계 구간의 공중 데크를 정비해 2017년 개장했다. 을지로∼퇴계로의 2단계 구간은 정비·신설돼 연말까지 완공된다. 그렇게 되면 종묘에서 남산까지 한 번도 끊기지 않고 걸으면서 서울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이런 건 세계 어디에도 없다.

세 번째는 세운상가에서 잔뼈 굵게 일해 온 기술 장인들의 실력이다.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어시스턴트였던 테크니션 이정성(77)씨가 그런 예다. 그는 “세운상가에서 20대 때부터 전자기술을 익히며 살았다. 백 선생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와 함께 전 세계를 돌며 이 기술을 팔았는데, 한 번도 서구의 기술자들한테 져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금도 외국 예술가들은 세운상가에 와서 설치미술 작품을 제작해서 가기도 한다. 도심에 남은 전기·전자, 인쇄, 음향, 공구 등 제조업 기반은 미래의 먹거리가 될 수 있다. ‘세상의 기운을 모았다’는 뜻의 세운상가는 21세기 서울의 복덩이가 될 것 같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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