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칼럼] 사익 정치, 결국 부머 리무버 될 것

국민일보

[김명호 칼럼] 사익 정치, 결국 부머 리무버 될 것

입력 2020-03-23 04:01

서구 밀레니얼은 코로나19가 베이비붐 세대 제거를 예측
조금의 변화도 거부하는 기성세대 향한 정치적 분노
위기 속 제기능 못하는 우리 기성세대의 정치·리더십과
꼰대적 정파 행위가 자신들을 스스로 제거하게 될 것


미국과 유럽에서 코로나19가 퍼지면서 ‘부머 리무버(Boomer Remover)’라는 신조어가 SNS를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코로나19의 별칭으로, 주로 10, 20대가 사용한다. 코로나19가 나이 많은 기성세대인 베이비 부머를 제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코로나19가 ‘꼰대 제거기’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섬뜩하다. 국내에서 유행하는 ‘라떼 호스(나 때는 말이야)’ 정도는 애교 수준이다. 부머 리무버에는 조롱과 풍자, 나아가 분노와 혐오가 섞여 있다. 이 표현 자체가 상당히 정치적이다.

뉴스위크는 지난 13일 기사에서 10대 청소년들이 트위터 등을 통해 이 표현을 폭발적으로 쓰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은 기성세대가 탐욕에 찌들었으며, 경제를 망가뜨렸고, 지구를 병들게 했다고 비난한다. 어떤 글에서는 “아저씨들은 그냥 앉아 있기나 해” “그 정도 했으면 충분하지 않나”라고 비난한다. 기성세대를 조금의 변화도 거부하는 ‘현실안주자(status quoist)’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코로나19가 기성세대의 이런 요소들을 싹 쓸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담겨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부머 리무버 현상을 청년세대가 기성세대에게 갖고 있는 정치적 분노를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은 어떤가.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몇 가지를 가르쳐줬다. 첫째, 정치의 중요성을 알려줬다. 전례 없는 국가 위기가 닥쳤는데 베이비붐 세대가 주도하는 정치는 기능 자체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검찰 개혁이니, 비례정당이니, 선거법 개정이니, 기득권 지키기 싸움만 하다가, 위기가 터지니 아무런 도움이 없다. 민간에서 먼저 나온 사회적 거리두기에 뒤늦게 한발 걸치기나 한다. 친중국이냐, 신천지로 위기 탈출하느냐 등의 총선용 ‘코로나 백배 활용하기’ 전략만 나오고, 막대기 꽂기식으로 비례대표 공천 다툼만 있다. 수준 높은 방역은 의료진과 시민의식 같은 민간 덕택이다. 정치가 국민을 위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둘째, 리더십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줬다. 마스크 대란은 애당초 잘 관리했다면 일어날 게 아니었다. 초기에 ‘마스크 정도는…’이라는 안이한 판단에 이어 수요 예측까지 빗나감으로써 리더십의 부재와 무능을 드러냈다. 조기종식 발언과 함께 마스크를 쓰는 게 좋다, 안 써도 된다 등 대국민 메시지도 혼란 그 자체였다.

셋째, 무엇보다 진보·보수 진영의 싸움이 얼마나 민생과 동떨어진, 가치 없는 싸움인지 알았다. 진영 싸움은 보다 나은 삶, 사람이 먼저인 사회를 만드는 게 아니라 단지 패거리 지어 우리 편 이익 최대화가 목적이란 걸 알게 됐다. 위성정당의 비례대표 공천 과정을 보면 이쪽 편 저쪽 편 동네 건달들이 무리 지어 위세를 떨며 동네 가게주인(국민)에게 자기 사람 월급 주고 데려다 쓰라고 협박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기성세대가 벌이는 한국 정치가 지금 이렇다. 코로나19 와중에 드러난 기성세대의 꼰대적 정치 행태가 기성세대 주도의 정치권 자체를 소멸시키는 ‘셀프 부머 리무버’가 될 수도 있다. 공천 과정과 후보들의 면면, 오로지 상대편 증오만 부추기는 총선 프레임은 안타깝지만 21대 국회가 20대보다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걱정을 갖게 한다. 86세대 중심의 정치가 자기 세대의 탐욕스러운 정치 행위로 변화를 거부하는 꼰대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결과적으로 자기 세대의 정치를 소멸시키는 셀프 부머 리무버의 역할을 하게 될 게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세균은 인간의 몸속 영양분을 섭취하도록 진화했으며 피해자가 죽거나 저항하면 살 수 없으므로 새로운 피해자의 몸으로 옮겨가는 여러 가지 방법을 진화시켜 왔고, 인간은 체온을 높이거나 면역체계 가동 같은 대응방법을 진화시켰다’고 썼다. 그래서 ‘인간과 세균이 격화하는 진화적 경쟁 관계’라고 규정했다. 지는 쪽이 죽는 거다. 나쁜 정치라는 바이러스가 죽느냐, 정치 자체가 죽느냐. 프랑스 사상가 조제프 드메스트르는 “모든 국가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고 일갈했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리더를 갖는다는 뜻으로 자주 인용된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역시 선택을 잘해야 한다. 비루한 정치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면 말이다.

김명호 편집인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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