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고난에도 실망 말라, 주님은 수호천사 주신다”

국민일보

[한국기독역사여행] “고난에도 실망 말라, 주님은 수호천사 주신다”

기독 ‘소년’ 이을식 장로와 서울 종각

입력 2020-04-03 17:51 수정 2020-04-0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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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 흰 건물이 1919년 3·1독립선언이 이뤄졌던 옛 태화관 자리. 지금은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이다. 그 오른쪽 건물은 중앙감리교회(당시 종로교회), 붉은벽돌 예배당은 승동장로교회다. 서울YMCA 뒤편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모습이다.
서울 종로2가 서울YMCA 건물을 마주하고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서면 마치 1970년대를 시간여행 하는 것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좁은 골목과 낡은 한옥이 세월의 더께를 말해준다. 그 길을 100m쯤 걸어가자 전에 볼 수 없었던 한국교회사의 한 장면이 한눈에 들어왔다. 4~5층 높이 작은 건물 몇 동을 철거하고 터파기 공사가 진행되면서 시야가 확보돼 귀한 장면을 포착할 수 있었다.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 중앙감리교회, 승동장로교회이다. 1919년 3월 1일 당시 태화관에서는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태화관은 1921년 감리회가 넘겨받아 사회복지기관 태화여자관이 됐고 지금은 12층 건물의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 건물이다.

대학로 서울사대부속여중 교문. 1919년 3월 1일 당시의 탑골공원 정문을 그대로 이전했다.
바로 옆 중앙감리교회(초기 종로교회) 건물은 일반인에게 하나로빌딩으로 불린다. 종로교회는 1890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설립해 서울 정동교회와 함께 감리회 ‘부·모 교회’로 불린다. 1903년 설립된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 전신)가 1918년까지 종로교회 안에 있었다.

그 옆으로 1893년 설립된 승동교회 예배당이 유형문화재로 남아 있다. 이 세 지점과 서울YMCA, 그리고 서울YMCA 길 건너 대한기독교서회(1890년 설립) 등을 이으면 선교 타운이 된다. 아쉽게도 옛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건물은 승동교회뿐이다.

이을식 (1906~2007)
일경에게 맞고 청계천에 버려진 ‘소년’

1919년 3월 1일 종로교회 소년 이을식(1906~2007)은 담임목사 김창준(1890~1959·민족대표 33인·독립운동가)의 요청에 따라 새벽 탑동공원(현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독립선언서’ 10덩이와 태극기를 미리 가져다 놓은 것이다. 종로교회에서 불과 500m 거리였다.

그리고 오전 11시30분쯤 탑동공원에 군중이 몰렸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가 배포됐다. 이를 감지한 종로경찰서 형사와 순사들은 살기등등해 바삐 움직였다. 소년은 태극기를 나눠준 후 행렬을 따라 종각 방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대한독립 만세!”

“고로세(죽여 버리자)!”

서울 보신각(종각). 1919년 3월 1일 이을식 소년이 일경에 잔인한 폭행을 당한 곳이다.
시위 현장은 순식간에 참극의 현장으로 변했다. 수백명의 왜경이 사정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왜경은 종각 사거리에 진압 대오를 형성하고 토끼몰이하듯이 했다. 비명과 호통 소리, 다급한 발자국…. 짧은 순간 청년 하나가 몽둥이에 머리를 맞아 즉사하는 끔찍한 광경이 소년의 눈에 들어왔다. 어느 쪽으로든 도망쳐야 했다.

그 순간 소년은 목 부위를 뭔가로 맞은 듯했다. 퍽 소리와 함께 쓰러졌고 몽둥이질을 당했다. 정신을 잃었고 일어날 수 없었다.

서울 수송동 옛 보성사(인쇄소) 터. 이을식 소년이 독립선언서 인쇄물을 받아 전했다.
2020년 3월 23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거리가 한산했다. 중앙감리교회 북서쪽 500m 지점 수송공원에는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조계사 뒤편 소공원인 이곳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보성사 터다. 1916년 김창식 목사 주선으로 이을식 소년이 다니던 중동학원도 이 자리였다. 독립군 양성 신흥무관학교 후신 신흥대학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동학원은 조선총독부 강요에도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자 폐교되고 말았다. 소년은 할 수 없이 김 목사의 지도로 교회 일에 전념해야 했다. 1919년 2월 김 목사가 태극기를 갖다주며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 만드는 일 좀 배워라”고 했다. 소년은 묵묵히 배웠다.

2월 27일 김창준 목사가 육당 최남선이 완성한 ‘독립선언서’ 최종 문안을 갖고 와 보성사 이종일(1858~1925·독립운동가) 사장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다. “노파심인데 다른 짓 말고 곧바로 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을식은 훗날 “김 목사님이 어린 제가 심부름하는 것이 오히려 안전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 수송공원엔 이종일 동상이 서 있다.

그 소년은 3월 1일 정오 종각 근처 청계천가에 버려져 있었다. 그 시각 변호사 김병로(1887~1964·독립운동가)가 소년 이을식의 ‘시신’을 봤다. 다른 이들의 시신도 뒹굴고 있었다. 아들의 친구이긴 했지만 종로경찰서에 가서 ‘독립선언 33인’의 상황을 알아봐야 하는 일이 급해 시신은 나중에 거둘 참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광교 쪽에서 지게 진 행상 부부가 경악하며 시신 사이를 지날 때 죽은 줄 알았던 소년이 신음소리를 냈다. 왼쪽 다리가 세 토막으로 부러져 있었다. 부부는 이 소년을 둘러업고 남대문 남쪽 세브란스병원으로 뛰었다. 부인의 치마로 소년의 다리 혈관이 끊어지지 않게 감싼 채였다.

“사람이 살아 있는 것 같아 데려왔습니다.” 부부가 그렇게 말하자 미국 의료선교사가 “세상에… 하나님 은혜입니다. 이러고도 살 수 있었다는 게…”라고 말했다. 그 삼일절의 소년은 기적처럼 살아 92년 동안 중앙감리교회를 섬겼다.

1950년대 청백리 표상 된 ‘소년’

1953년 1월 20일 전남도지사 시절 도지사 이을식(왼쪽)과 이승만 대통령, 미군 밴플릿 장군. 이 대통령의 전남 시찰 때 진도 군수실에서 찍은 사진.
신앙 안에서 자란 소년은 청백리의 표상이 됐다. 6·25전쟁 중 전남도지사가 된 그는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가난한 이들의 공복이 됐다. 어느 날 새벽 도민이 걱정돼 시찰하다 광주천에 버려진 고아를 발견, 관사로 데려와 씻겼다. 발견 당시 경찰차가 순찰하길래 세웠더니 “서장 구두끈 사러 가는 중”이라고 하던 시절이었다. 뇌물이 눈을 멀게(신 16:18) 하던 시대였다. 그는 봉급과 서울 집을 빈민구제에 썼다. 그가 거둔 고아들은 양림고아원 이현필(1913~1964·영성운동가)이 보살폈다.

1953년 2월 전남대 설립을 주도한 이을식 전남지사의 졸업식 축사 모습.
“저를 살려준 행상 부인은 세브란스병원에서 속곳 바람으로 제 보호자가 사시는 계동 작은아버지에게 달려가 알렸습니다. 저는 부부가 수호천사란 걸 믿습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예수를 떠나 살 수 있었겠습니까.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수호천사를 찾지 못했어요. 여러분 고난에도 두려워 마십시오. 하나님은 날 때부터 우리에게 수호천사를 주십니다.”

평생 장애인으로 살았던 ‘장로 이을식 소년’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1906년 전북 옥구 임피생
·1915년 서울 계동 숙부댁 유학 및 종로교회 출석
·1926년 고향서 야학당 운영
·1927년 논산 강경상고 진학
·1933년 전주 배은희 목사 집례로 세례
·1941년 이남규 목사와 연루 고문당함
·1945~46년 조선건준 등 기독교정치운동
·1951~1953년 전남지사
·1952년 전남대 설립 주도
·2007년까지 중앙감리교회 92년간 섬김

글·사진=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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