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스피노자와 달리 나는 앵두나무를 심겠다

국민일보

[너섬情談] 스피노자와 달리 나는 앵두나무를 심겠다

황교익 칼럼니스트

입력 2020-04-01 04:01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 명언을 들었을 때에 처음 든 생각은 이랬다. “아, 지구가 멸망할 수도 있구나.” 스피노자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세기적 철학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명언을 들려준 사람이 ‘세기적 명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지구가 어떻게 멸망할 것인지 상상을 했다. 화산이 터져서 용암이 흐르고 땅이 갈라졌다. 지구 위의 모든 것이 불타고 땅속으로 묻혔다. 스피노자가 전날 심어놓은 사과나무만이 온전했다. 스피노자는 위대한 철학자이므로 그의 사과나무는 멸망한 지구 위에서 버티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했다. 그때 나는 사춘기였다.

젊어서는 스피노자의 사과나무 명언에 대한 철학적 해석들을 읽었다. 그의 범신론이며, 그의 슬픈 생애와 엉키어 친구들 술잔 사이로 스피노자의 사과나무는 떠다녔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깨지고 고주망태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스피노자가 슬며시 나타나 내게 속삭였다. “내일 당장에 지구가 멸망할 것 같지? 오늘도 사과나무 하나 심은 거야. 고생했어.” 스피노자는 위대한 철학자이고, 명상가이며, 의사에, 구루이시며, 그랬다.

문득,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명언이 스피노자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온갖 자료를 뒤졌다. 마르틴 루터의 명언이라는 말도 있고, 또 그의 말이 아니라는 말도 있고, 현재로서는 ‘작자 미상’의 명언이라고 봐야 한다.

나는 ‘정신적 승리’의 길을 선택했다. 스피노자이든, 마르틴 루터이든, 작자 미상이든, 뭐 어떤가.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이 말이 멋진 말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 않은가. 스피노자를 버리자, 이젠 사과나무가 내게 의문을 던졌다. 왜 사과나무이지? 포도나무이면 안 되나? 서양의 신화와 종교에 사과로 등장하는 수많은 상징 중에 무엇을 붙여볼까. 나는 감이 없다. 대신에,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나는 어떤 나무를 심어볼까 상상했다. 명언에 권위가 사라지니 변주가 가능해졌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 났네~.”

1957년에 발표된 ‘앵두나무 처녀’라는 노래이다. 앵두는 4월에 하얀 꽃이 핀다. 우물가에 봄바람이 불고 하얀 꽃잎이 날리니 처녀의 마음이 달뜰 수밖에 없는 화사한 봄을 그리는 듯하지만, 이어지는 노랫말은 서글픈 농촌 현실을 담고 있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2절 가사는 이쁜이와 금순이를 따라 동네 총각인 복돌이와 삼용이도 서울로 향하고, 3절에서는 복돌이가 서울에서 ‘빨간 입술에 웃음 파는 에레나’ 이쁜이를 만나 “고향에 가자” 한다.

옛날에 농촌에는 앵두나무가 아무렇게나 심어져 있었다. 하얀 꽃이 지고 두 달이 지나면 빨간 앵두가 달린다. 앵두는 익은 후 단 이레 만에 떨어진다. 이때가 모내기철인데 날 잡아 앵두 거두는 일이 쉽지 않다. 비라도 오면 앵두는 다 터진다. 그래서 주인이 있는 앵두나무도 앵두 딸 시간이 없으면 이웃에게 그냥 따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앵두는 욕심을 부릴 수 없는 과일이고, 그래서 마을의 누구든 딸 수 있는 공동체의 과일이다.

노래 속의 ‘앵두나무 우물가’는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쁜이와 금순이를 달뜨게 한 바람은 산업화의 바람이며 공동체 파괴의 바람이다. “고향에 가자” 하지만, 복돌이도 삼용이도 도시에 눌러앉았을 것이다. 힘들어도 밥벌이할 수 있는 일이 도시에 더 많은 까닭이다. 한국의 도시인은 3대만 올라가면 다 촌사람이다. 이웃집에 누가 사는 줄도 모르는 도시의 마을에 옛날의 마을 공동체 나무 한 그루씩 심으면 어떨까 상상한다. 곧 식목일이다. 여러분은 어떤 나무 심을래요.

황교익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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