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자살 시도, 기초생활수급… 악몽, 끝나지 않았다 [이슈&탐사]

국민일보

[단독] 자살 시도, 기초생활수급… 악몽, 끝나지 않았다 [이슈&탐사]

[형제복지원 실태보고서] 국가 보살핌 못 받아 빈궁한 삶

입력 2020-04-27 04:07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이 공터에서 흙을 파고 있는 모습. 부산시의 실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6.6%가 형제복지원 생활 중에 강제 노역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증언과 기록에 따르면 수용자들은 형제복지원의 각종 시설 공사에 무상으로 동원됐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부산시가 진행한 형제복지원 피해자 첫 공식 실태조사에서 형제복지원 수용 이후 산산조각 난 피해자들의 삶이 적나라하게 확인됐다. 끔찍한 과거는 평생을 발목 잡았다. 피해자들은 “나 자신이 깨져버려서 그게 너무 허망하다” “가정과 인생이 뒤죽박죽이 됐다”고 고백했다.

부산시 설문조사는 피해자 149명을 대상으로, 심층조사는 설문 참여자 21명과 정신병원 등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재원 피해자 9명, 유가족 9명 등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설문조사자 절반 이상은 1회 이상 자살을 시도했다.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으로 목숨을 잃은 동료 사례도 여러 건 증언됐다.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피해자들은 가난의 굴레에 빠져 있었다. 응답자 절반 가까이(45.0%·67명)가 기초생활보장수급자였다. 수급 신청을 했다가 탈락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53%에 달한다. 끔찍한 만행을 겪은 뒤에도 국가의 보살핌을 받지 못해 절망과 가난 속에 평생을 지낸 사람이 많다는 의미다.



복지원 이후에도 빈궁한 삶

피해자 31.3%는 ‘달방’으로 불리는 보증금 없는 월세방에 살고 있었다. 이들을 포함해 55.1%가 월세 생활자였다. 조사자 32.6%는 지난 1년간 집세를 연체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17.8%는 집세 미납으로 이사한 경험도 있었다. 13.4%는 고시원이나 쪽방 등 주택 이외 공간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29.2%는 건강보험료 연체로 건강보험 자격이 정지된 경험을 토로했다. 피해자 32.9%는 현재 장애가 있다고 답했다. 복지원 입소 전 장애가 있었다고 답한 비율은 4.7%에 불과했다.

지금의 열악한 경제적 상황은 형제복지원 생활에서 비롯됐다는 게 연구팀 분석 결과다. 심층면접에 응한 한 피해자는 “한창 배울 나이에 배우지 못한 게 한탄스럽다. 배움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힘들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다른 피해자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도둑질로 교도소를 들락거렸다”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경찰(56.4%)에 붙잡혀 끌려갔다는 응답이 많았다. “지금도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못 잔다” “술을 마시면 죽은 사람 얼굴이 떠오른다”는 토로도 이어졌다. 박숙경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조사를 마치고 부산역을 보는데 그곳이 괴물의 아가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첫 공식 조사 강제조사권 없어 한계 노출

형제복지원 관련 진상규명은 줄곧 민간 차원에서만 이뤄져 왔다. 그동안 피해자와 인권단체 등으로 구성된 형제복지원피해대책위원회에서 조사해왔지만 공권력이 없어 정확한 피해 규모를 확인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번 연구는 부산시 차원에서 진행한 첫 공식 조사로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국가 책임을 묻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계는 있었다. 강제성 있는 조사의 근거가 될 과거사법(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이나 형제복지원 특별법 등 논의에 진전이 없기 때문이다. 20대 국회는 다음 달 임기를 마친다. 실태조사를 총괄한 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26일 “사망자에 대한 기록조차 제대로 확보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하루빨리 국회에서 법이 통과돼 온전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단독] “원장이 원생 삽으로 내리찍어… 형제복지원장실 피 범벅된 날도” [이슈&탐사]
[단독] 염전에 팔리고 정신병원 수용되고… 그때 그 소년들 [이슈&탐사]

전웅빈 김판 임주언 박세원 기자 imung@kmib.co.kr

많이 본 기사

포토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