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산다] 낭푼밥 관습

국민일보

[제주에 산다] 낭푼밥 관습

박두호 전 언론인

입력 2020-05-02 04:05

마을 사람이 차에 노모와 가족을 태우고 어딘가 가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어디 감수꽈?” “식게 먹으러 감수다.” 식게? 제주 좀 살았다고 제주말로 물었더니 여전히 모를 말이 돌아왔다. “식게가 뭐꽈?” “아, 제사”라고 고쳐 말해줬다. 제사는 죽은 사람의 넋이 와서 먹도록 음식을 차려 놓고 그를 기억하는 의식이다. 그래서 보통 제사를 드린다, 올린다, 모신다고 한다. 그런데 방금 제사를 먹는다고 했다.

제사는 후손들이 제사상을 차려 예를 표한 뒤 제사 음식을 나눠 먹으며 참석자들이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순서로 진행된다. 예를 표하는, 드린다는 기능과 음식을 나누는, 먹는다는 2개의 기능으로 구성됐다고 볼 수 있다. 제주 사람들은 후자인 먹는 기능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제주는 먹고살기 힘들었다.

‘가난혼 집 식게 돌아오듯 한다’는 말은 육지나 섬이나 마찬가지로 쓰지만 ‘궤기에 곤밥은 식게 멩질 때나 꼴을 봐낫저’(고기와 쌀밥은 제사 명절 때나 봤다)는 섬에서나 들을 수 있다. 아이들은 제사 끝나면 곤밥과 궤기 한 점 먹으려 쏟아지는 잠을 참았다. ‘식게집 아이는 건드리지 마라’는 식게떡 하나라도 얻어먹으려면 식게 있는 집 아이에게 잘 보이라는 말이다.

제주 사람들이 쌀밥을 먹게 된 때는 1990년대 들어서다. 제주 동부지역 일찍 깬 농사꾼들이 보리밭을 빌려 당근 농사로 큰 소득을 올렸다. 이어서 무 농사가 대박 나고 기계화가 되며 규모가 커졌다. 밭을 빌려 당근을 심은 뒤 농사가 잘되면 그 밭 소출로 그 밭을 살 수 있을 때였다. 보리밭은 점차 당근밭, 무밭으로 변하고 제주 사람들은 비로소 농사지은 보리 대신 당근 팔아 쌀을 사는 유통 시스템에 편입된다. 제주의 경제 구조가 바뀌는 시기다. 제주 사람들은 그때를 88올림픽 끝난 뒤라고 기억하고 있다.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제주도 경제사 시대 구분은 이 시기 전과 후로 나눠야 할지 모른다.

제주 사람들은 ‘낭푼밥’을 먹었다. 커다란 양푼에 보리밥을 가득 퍼 밥상 가운데 놓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먹는 것을 이른다. 반찬은 김치와 자리, 또는 멜젓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밥을 따로 퍼 드렸다. 낭푼밥 관습은 제주의 노동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 엄마는 하루 종일 바다에 나가 물질하고 밭에 가서 검질맸다.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애들 학교 보내는 소위 살림만 하는 전업주부는 제주에 없다. 어린 딸이 더 어린 동생 업고 밥 짓거나 남자들이 상을 차렸다. 어렵게 살았다.

내가 나가는 동네 낚시 모임은 20명 정도 된다. 대부분 제주 토박이다. 이들은 코로나로 경제가 추락한다고 걱정하는 뉴스를 남의 일 보듯 한다. 제주 사람들은 얼마 오래지 않은 때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돈을 쓰지 않고 사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써보지 않았고 쓸 일도 없다. 벌이가 줄어 덜 쓰는 건 일도 아니다. 걱정은 돈을 쓰며 살던 사람들 이야기다. 제사 먹으려고 기다리며 어렵게 살아온 제주 사람들은 그래서 지금 뭐 이렇다 할 걱정 없이 산다.

박두호 전 언론인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