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재난이 독서를 불렀다

국민일보

[너섬情談] 재난이 독서를 불렀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입력 2020-05-06 04:04

코로나19에 따른 ‘물리적 거리두기’가 실행되었을 때 솔직히 황당했다. ‘기억전달자’의 그래픽 노블을 번역해 출간한 게 3월 첫 주였다. 이번엔 독자 만남이나 학교 강연 등도 기획해 보자고 편집자랑 약속했는데 모든 계획이 증발해 버렸다. 도서관은 문을 닫고, 학교는 폐쇄되고, 서점은 한산해졌다. 도무지 책이 팔릴 것 같지 않았다.

필자만 걱정한 건 아니다. 주변의 출판인들도 비슷했다. 모바일 기기를 통한 콘텐츠 소비가 빠르게 늘어난 지난 10년 동안 시민들 관심을 사로잡는 사건이 있을 때마다 책 판매는 줄어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출판의 묵시록을 쓰는 게 아닐까 싶었다.

석 달 가까이 지났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재난이 오히려 독서를 만들어 냈다. 사람들이 ‘갑자기’ 책으로 돌아왔다. 어느 독자 말대로 “여행도, 외출도 못 하니 책이나 읽는다”였을까?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를 보면 그사이 읽은 책이 십여권 이상 되는 이들이 상당하다.

먼저 어린이책에서 조짐이 생겨났다. 학교나 학원이 문을 닫자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책을 사주기 시작한 것이다. 교사들이 추천 도서목록을 적절히 제공하면서 아이들 독서지도에 나선 덕분이기도 하고, 도서관 등에서 책을 구하지 못하거나 책을 돌려 읽다 감염될까 우려한 탓이기도 하다. 인터파크 자료에 따르면 아동 부문의 전년 대비 3월 성장률이 170%를 기록했다. 우려하던 번역서도 초판 3000부가 소진돼 새로 3000부를 찍었다.

다음으로 움직인 이들은 소설 독자들이다. 카뮈의 ‘페스트’가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인간의 필연적 운명, 즉 인간이 질병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상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학은 인간적 위엄을 어떻게 지켜 갈 것인가를 길잡이 한다. 물론 답답한 일상을 단숨에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게 해주는 효과도 크다. 소설 부문 3월 성장률은 195%에 이르렀다. 이야기의 힘이 빛났다.

인문서 부문 성장률도 증가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지리의 힘’ 등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소개된 책들의 판매가 치솟았다. 또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나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 수업 365’ 등 심각하지 않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짬짜미 인문학 서적들도 독자들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 이른바 동학 개미들의 주식 투자 열풍 탓인지 재테크와 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경제경영서와 자기계발서 판매도 늘어났다.

재난에 빠진 인간에게는 늘 책이 필요했다.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어떤 책이라도 좋으니 아무튼 책을 좀…”이라고 외치면서 서점으로 몰려들었다. 시리아 내전 와중에도 사람들은 책을 갈망했다. 폭탄이 떨어지는데도 시민들은 목숨을 걸고 비밀 도서관을 찾아와 책을 빌려 갔다.

일상이 완전히 비틀렸을 때 사람들은 읽기를 통해 불안을 극복하고 희망을 복원한다. 책 속에는 여전히 평온한 하루가 있고, 인간다움을 이룩하려는 분투가 있다. 재앙을 불러들인 삶의 방식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통렬한 비판이 있고, 비상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지혜가 있다. 무엇보다 인간은 책을 통해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다. 한 구절이라도 마음에 닿는 부분이 있으면 충분하다. 공감이 연대를 부르고 연대가 미래를 이룩한다. 읽기가 있는 한 완전한 절망은 없다. 재난이 독서를 부르는 이유다.

주의할 것이 있다. 신간을 펴내고 판매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소규모 출판사들은 어렵다. 독특한 큐레이션으로 주목받던 독립서점들도 힘겹다. 독서가 세간의 화제작과 검증된 스테디셀러로 몰리고, 판매가 온라인 서점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반드시 별도 지원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팬데믹 탓에 독서가 잠깐 늘었지만 해마다 독자가 줄어드는 독서 자체의 재난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재난은 도대체 무엇이 구원할 것인가.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