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세금도 투자다

국민일보

[데스크시각] 세금도 투자다

한장희 산업부장

입력 2020-05-07 04:04

헤지펀드 투자자 조지 소로스, 페이스북 공동설립자 크리스 휴스 등 ‘슈퍼 리치(Super Rich)’라 불리는 미국의 억만장자 19명이 지난해 미국 대선 후보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자신들 같은 상위 0.1% 자산가들에게 ‘적절한 부유세’를 부과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부유세는 사랑하는 조국을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라며 기후위기 해결, 의료서비스 개선, 학자금 대출 경감, 저소득층 세제 혜택 등에 우선 투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한에 언급된 엘리자베스 워런 당시 민주당 대선 주자의 공약대로라면 이들은 매년 수천억원을 부유세로 내야 한다.

억만장자들이 스스로 밝힌 부유세 부과의 명분은 의외였다. 이들은 서한에 “The next dollar of new tax revenue should come from the most financially fortunate(재정적으로 운이 좋은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세금을 걷어야 한다)”고 적었다. 물론 순전히 운만으로 이들이 억만장자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운이 좋았다’는 말은 ‘사회가 준 기회를 운 좋게 잘 활용했다’는 겸손한 표현이라 해석하는 게 맞겠다.

결국 이들의 주장은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지난 30년간 미국 상위 1%의 순자산이 21조 달러 증가한 반면 하위 50%의 순자산은 9000억 달러 감소할 정도로 양극화가 심해졌고 위화감도 확산됐다. 자신들에게 큰 부를 안겨준 미국 사회가 자산 불평등으로 병들자 치유 방안으로 부유세를 제안한 것이다. 결국 ‘성공’을 처벌하는 징벌적 세금이 아닌 경제적 편중을 완화하는 안전판, 즉 투자 개념으로 부유세를 규정한 셈이다.

지난해 미국에서 벌어진 얘기를 다시 꺼낸 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후유증으로 한국 사회 양극화도 더 깊어질 수 있어서다. 정부와 새로 출범하는 21대 국회는 자산 불평등 완화 해법을 찾는 게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우선 과제가 될 수 있다. 관제 기부 논란이 일고 있는 긴급재난지원금은 임시방편이지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부유세도 고려할 수 있는 옵션 중 하나다. 소득이 있는 곳에 과세한다는 조세원칙에 부합하지 않고, 회피를 위한 이혼과 자본 유출 등 부작용도 크다지만 사실상 부유세인 종합부동산세가 이미 시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충분히 토론해볼 수 있는 이슈다.

코로나19는 공동체 의식을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내 이웃의 병이 나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고, 이웃이 건강해야 궁극적으로 나와 가족의 안전도 보장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절감했다. 중요한 건 감염병 못지않게 감정도 쉽게 전이된다는 점이다. ‘언택트 사회’가 도래했다지만 불행이나 위화감은 그 어떤 감정보다 전이 속도가 빠르다. 매일 끼니 걱정에 시달리고, 일터에서 실업과 목숨의 위협을 느껴야 하는 이웃이 많은 사회 속 구성원의 행복지수는 바닥일 수밖에 없다.

시장의 조율기능은 한계가 있다. 기업은 분명히 고용의 주체이지만, 공공선보다는 이윤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호황기에 노선 늘리기에 바빴던 항공사 중 어느 업체도 한순간에 모든 비행기가 멈춰서 직원들이 기약 없는 휴직에 들어가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전망한 곳은 없다. 결국 사회안전망을 책임지는 공공기능이 원활하게 작동해야 공동체 건강이 유지된다. 여기엔 천문학적 비용이 수반된다.

재벌이라고 해도 돈이 넘쳐나는 건 아니다. 투자와 고용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감세해 달라는 요구도 지극히 타당하다. 하지만 발 딛고 있는 사회의 건강을 위해 ‘적절한 부유세’가 필요하다는 미국 슈퍼리치들의 주장도 이제 곱씹어 볼 때가 됐다.

한장희 산업부장 jhhan@kmib.co.kr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