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 칼럼] 진보적 보수주의 깃발 들어야

국민일보

[박정태 칼럼] 진보적 보수주의 깃발 들어야

입력 2020-05-11 04:01

궤멸적 참패 통합당,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지리멸렬 상태
시대 읽는 통찰, 실용적 대처, 과감한 개혁, 따뜻한 보수로
국민에게 다가가 외연 넓혀야
창조적 파괴와 혁신 없으면 만년 야당 면하기 어려워

21대 국회를 이끌 여야의 신임 원내사령탑이 20대 국회의 민생법안 처리에 공감했다는 소식은 반갑다.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가 부친상을 당한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를 엊그제 조문하면서 이런 교감을 가졌다니 출발이 좋다. 물론 높은 점수를 줄 정도는 아니다. 20대 국회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평가를 받으려면 21대 국회가 ‘신뢰받는 국회’로 작동돼야 한다. 그러려면 4·15 총선의 궤멸적 참패로 자중지란에 빠진 통합당이 건전한 견제세력으로 되살아나야 한다. 여권은 일사불란한 당정청 ‘원팀’ 체제를 구축해 경제난 극복과 각종 개혁 입법 처리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태세다. 10일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3주년 특별연설을 보면 정권 재창출을 위해 벌써 시동을 건 느낌이다. 반면 통합당은 갈 길이 멀다.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할 처지니 슈퍼 여당의 독주를 견제하는 것도 벅차 보인다.

보수와 진보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두 축이다. 하나라도 고장이 나면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다. 상호 균형과 견제, 보완이 이뤄져야 역사의 건강한 발전이 가능하다. 하지만 보수가 처참하게 무너진 상태다. 수도권에서 몰락하며 영남당, 강남당으로 쪼그라들었다. 시대정신을 읽지 못한 탓이다. 유권자 세대교체 등 정치 지형이 재편되고 있음에도 수구적 태도를 버리지 못해 자멸했다. 대한민국 주류가 산업화세력에서 민주화세력으로 바뀌었는데도 60대 이상에게만 먹힐 수 있는 냉전 시대 가치와 낡은 정치를 고집한 결과다. 태극기 부대를 등에 업은 시대착오적 색깔 논쟁, 기득권에 매몰된 구태의연한 정책, 대안 없는 막무가내식 반대, 품격 잃은 막말 등은 스스로를 ‘낙동강 벨트’에 고립되도록 만들었다.

한국 보수의 절체절명 위기 때에 소개되는 선구적 인물이 있다. 19세기 후반 생존조차 불투명했던 영국 보수당을 되살려 ‘보수당의 아버지’로 불린 벤저민 디즈레일리다. 총리를 두 차례 역임한 그는 산업혁명 이후 정치적 변혁의 시기에 보수당이 곡물법 파동으로 위기에 처하자 자유당보다 더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내걸고 난국을 돌파했다. 보수당 지지층은 귀족과 지주계급이었으나 디즈레일리는 노동자계급의 선거권 확대를 시작으로 유권자의 삶과 직결된 위생 수준 제고, 노동조건 개선, 빈민 주택 제공 등 사회개혁 이슈의 주도권을 쥐고 국민에게 다가갔다. 이념적 지평 확장, 당의 외연 확대 등으로 이어졌고 새로운 보수당, 즉 전국 정당·국민 정당으로 탈바꿈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한국 보수의 생존을 위한 메시지는 이것이다. “디즈레일리가 지금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보수주의자였다고 해도 변화를 거부하거나 기득권에 안주하려 하거나 혹은 과거로 되돌리려고 하지 않고 시대가 필요로 하는 변화의 방향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과감한 변화와 개혁을 추진해나갔다는 점 때문이다”(‘위기를 극복한 세계의 리더들’ 중 강원택 서울대 교수의 ‘벤저민 디즈레일리’ 편). 이념에 앞서 시대를 읽는 통찰과 유연하고 실용적인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통합당은 근본적 체질 개선이 요구된다. 그렇지만 성찰의 시간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지리멸렬한 상태다. 당 차원의 패인 분석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원내사령탑에 떠넘긴 ‘김종인 비대위’를 놓고도 중구난방이다. 문제는 형식이 아닌 내용이다. 개혁의 흉내만 내다 과거로 회귀해 기득권을 지킬 요량이라면 비대위를 띄우든, 전당대회를 하든 그 나물에 그 밥일 뿐이다. 혁신의 깃발을 들고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문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고공행진 중이다(6∼7일 한국갤럽 여론조사 71%). 이젠 보수층에서도 긍정 평가가 더 높다. 민주당 지지율도 46%다. 반면 통합당은 17%로 창당 이후 최저치다. 침몰 직전의 통합당은 시대 흐름에 맞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접근해야 한다.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면 수권정당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코로나 국난 극복을 위한 ‘한국판 뉴딜’이나 고용안전망 확충 등 경제·복지 정책과 맞닥뜨릴 때 디즈레일리처럼 정부 여당보다 더 파격적인 안을 내세워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외연을 넓히려면 냉혹한 시장 논리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껴안는 따뜻한 보수가 필요하다. 진보적 보수주의다. 그게 혁신이다. 창조적 파괴를 하지 않으면 만년 야당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어느 길을 갈 것인지는 오로지 통합당에 달렸다.

박정태 수석논설위원 jt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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