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하려는 자’와 ‘안 하려는 자’

국민일보

[청사초롱] ‘하려는 자’와 ‘안 하려는 자’

김영훈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입력 2020-05-13 04:02

라면을 끓일 때마다 우리 집에서는 전쟁이 일어난다. 중학생인 딸과 아들의 이야기이다. 딸은 매운맛을 즐기고 아들은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그래서 딸은 매운맛 라면을 끓여달라고 외치고, 아들은 매운맛 라면을 끓이면 밥을 안 먹겠다며 엄마를 협박하고 순한맛 라면을 끓여달라고 외친다. 엄마는 과연 어떤 맛의 라면을 끓일까? 안타깝게도 엄마는 매운맛을 외치는 딸의 절규를 뒤로한 채 (항상) 순한맛 라면을 끓이고, 아들은 매번 전쟁의 승자가 된다. 그렇다고 라면 전쟁에서 패한 딸의 인생이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대체물이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 없을 때 매운맛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고, 라면 말고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조금 불편할 뿐이다.

하지만, ‘하려는 자’와 ‘안 하려는 자’의전쟁은 현실에서 녹록지 않다. 특별히 부부의 세계에서는 이 문제가 심각하다. 부부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그것은 섹스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섹스 전쟁은 섹스를 ‘하려는 자’와 섹스를 ‘안 하려는 자’의 갈등이 핵심이다. 이 전쟁에서는 누가 승리할까? 라면 전쟁처럼 승자는 항상 섹스를 ‘안’ 하려는 자이다. “NO”라고 말하면 상황 종료다. 그래서 섹스를 하고 싶은 자는 (남자건 여자건) 자존심을 다 버리고 상대방 비위를 맞추며 없던 아양까지 다 떨어야 한다. 실패가 반복되면 ‘더럽고 치사하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섹스를 구걸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왜 ‘안 하려는 자’가 ‘하려는 자’를 이길 수밖에 없을까? ‘안 하려는 자’는 위험과 고통 그리고 불편함을 피해 도망하는 자이고, ‘하려는 자’는 즐거움과 기쁨을 좇는 자이기 때문이다. 누가 더 절박할까? 두말할 것 없이 ‘안 하려는 자’가 훨씬 더 절박하다. 위험과 고통 그리고 불편함은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지만, 즐거움과 기쁨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생존에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음식은 몸에 유익하지만 안 먹는다고 몸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쁜 음식은 몸에 해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매운맛 라면은 딸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안 먹는다고 해서 생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매운맛을 잘 먹지 못하는 아들에게 매운맛 라면은 고통을 동반하는 생존의 문제이다. 그래서 엄마는 매번 순한맛 라면을 끓일 수밖에 없다. 섹스를 하려는 자는 즐거움을 좇지만, 섹스를 안 하려는 자는 불편함을 피한다. 그래서 섹스의 즐거움을 좇는 자와 섹스의 불편함을 피하는 자가 부딪히면 생존에 더 위협이 되는 섹스를 피하는 자가 이길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즐거움을 위해 배우자에게 불편함을 감당하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면 전쟁과는 달리 부부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하려는 자’와 ‘안 하려는 자’의 섹스 전쟁은 참담하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담보하는 것을 넘어서 때로는 결혼생활을 파탄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라면 전쟁의 패자에게는 대체물이 있지만, 섹스 전쟁의 패자에게는 대체물이 없기 때문이다. ‘안 하려는 자’ 앞에서 패한 ‘하려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속수무책인 패자가 된다. 짜증과 불만만 눈덩이처럼 쌓일 뿐이다. 그래서 섹스 문제는 부부의 세계에서 언제나 세대를 넘어 치명적인 문제의 하나로 존재해 왔다.

해결 방법은 있는 것일까? 즐거움을 좇는 ‘하려는 자’가 ‘안 하려는 자’의 불편함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먼저 필요하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섹스 전쟁의 패권을 가진 자가 ‘섹스를 안 하려는 자’임을 고려하면 도리어 ‘섹스를 안 하려는 자’의 노력이 더 절실할지도 모르겠다.

김영훈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아직 살만한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