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가난한 공장 노동자들 껴안은 삶… 세상은 ‘바보들의 행진’이라 했다

국민일보

[한국기독역사여행] 가난한 공장 노동자들 껴안은 삶… 세상은 ‘바보들의 행진’이라 했다

산업선교 선구자 조지송 목사와 서울 영등포

입력 2020-05-15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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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가마니를 깔고 시작됐던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영은교회(맨 오른쪽 건물). 조지송·박조준 목사 등이 영등포경공업지구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산업전도의 열매였다. 그 가난의 땅에 지금은 학교, 대형 백화점, 지식산업센터, 유럽풍 노동청 건물(왼쪽부터)이 들어섰다. 당중초교 운동장에서 본 모습이다. 아래 흑백 사진은 영등포 60년대 모습.
영등포산업선교회(산선) 제공
2020년 5월 8일. 서울 양평동 당중초등학교 운동장에 서면 ‘대한민국 발전상’을 상징하는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상품이 넘쳐나는 대형마트, 유럽풍 건물의 고용노동부 서울남부지청, 디자인이 빼어난 지식산업센터 그리고 ‘안식과 평화의 성소’ 영은교회…. 이 건물들을 중산층 아파트가 둘러싸고 있다. 축복의 장면이다. 이곳이 1960~70년대 노동집약적 공장이 즐비했던 영등포공업지대여서 더욱 그렇다.

1964년 같은 자리. 어디를 봐도 공장 건물이 즐비하다. 굴뚝마다 공해 물질을 마구 내뿜는다. 서쪽 안양천 둑 건너 가난한 이들이 무허가 판자촌을 이루고 산다. 이곳은 장화 없이 살 수 없다. 퇴근 시간이면 매일 12시간씩 중노동한 노동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상경한 15세 전후의 청소년들이다.

조지송 목사 (1933~2019)
그 무렵 조지송 목사라는 이가 있었다. 30대에 들어선 그는 장신대를 졸업하고 예장총회 전도부와 예장 경기노회(노회장 방지일 목사)가 파송하는 산업전도 목사가 됐다. 그의 첫발은 지금의 ‘영등포산업선교회’(산선) 역사와 같다. 조지송은 64년 1월부터 1983년까지 산선의 ‘총무’를 지냈다. 그는 쉽고 편한 목회지가 얼마든지 가능했다. 또 산선과 같은 특수 목회를 하면서도 교계 정치를 통해 입지를 넓힐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총무’를 하나님 주신 직분으로 여겼다. 온유했고 강했다. 건강했더라면 그는 여전히 다정한 ‘총무 목사’로 은퇴했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그가 안고 실천했던 구절이다.

초기 산업전도 예배 후 기념사진. 공장 출입문 위에 십자가를 세웠다. 1960년 전후 추정. 산선 제공
그가 산업전도 목사로 양평동 한 공장의 식당에서 첫 예배를 드릴 때 2000여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절망했다. 모두가 졸았기 때문이다. 말씀에 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12시간 미싱라인 등에 투입된 노동자들에게 예배는 마지못해 참석해야 하는 근무의 연장이었다.

당시 영등포 경공업 지역에는 한영방직 동아염직 대한모직 대동모방 등 550여개 사업체와 4만여명의 공장 노동자가 있었다. 그곳 도림장로교회 산업전도회 선교보고에 따르면 ‘노동 조건이 극히 불량하며 노동자에게 로마 시대에나 행하던 복종과 맹종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전 근대적 기업경영과 노동 착취가 이뤄지던 시대였다.

산업전도는 그런 공장을 돌며 예배를 드리는 방식이었다. 기업주가 크리스천일 경우 그들의 협조를 얻어 예배를 드렸고, 성경공부를 시켰다. 한영방직처럼 아예 공장 안에 예배당을 세운 예도 있었다.

“맞교대 시간이면 예배 참석하라고 공장 문을 잠가요. 주말에는 18시간 근무로 돌아가던 시대였죠. 제가 ‘위장 취업’해 노동하면서 예배에 강제 참석하기도 했어요. 초청 설교자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고 말씀을 전하는데 피곤함에 절은 우리들 귀에 들어올 리 없지요. 찬송을 떠나가게 부르지만, 진심이 아닌 거죠. 이게 아닌데…. 노동자를 위한 산업전도가 돼야 하는데….”(조지송 생전 구술)

조지송은 설교 방식의 예배로는 한계가 있다고 봤다. 그렇다고 크리스천 기업주의 신앙과 선의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상황 논리이긴 하나 그들은 일반 기업주들보다 교육과 복지에서 앞선 데가 있었다. 조지송은 구내식당 예배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드려지는 사외(社外) 예배를 권했다.

지금은 대형교회가 된 영은교회는 바로 이러한 공장 노동자들의 기도와 헌신이 녹아 시작된 공동체다. 강제 예배에서 벗어난 이들은 동아·대한·대동 등 회사 임원진과 함께 새마을교회(현 당일교회) 등에 모여 같은 성도로서 교제했다. 이들이 지역별 업종별로 모이고 흩어지면서 많은 교회가 개척됐다. 영은교회도 공장 선교에 나섰던 조지송 박조준 목사 등이 가마니를 깔고 드리는 예배에서 시작됐다. 그들은 떡과 배움을 나눴다.

조지송 목사가 공장 노동자 야외 예배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산선 제공
조지송은 산업선교 1세대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일으켰다. 밤 12시건 새벽이건 노동자들의 퇴근 시간에 맞춰 찾아가 ‘목사 친구’가 됐다. 산선 사무실에는 ‘따뜻한 아버지’에게 상담받으려는 여공들로 붐볐다. 퇴직금을 못 받고, 부당 해고를 당하고, 성희롱을 당하는 이들이 조지송과 산선 교역자들을 통해 권리를 지켜냈다.

조지송은 예배, 기도회, 영어·한문·성경 공부, 좌담회, 교양강좌, 친목회, 음악감상 등의 프로그램으로 그들을 위로했다.

“어느 날 초등학교 나온 16세 소녀 노동자가 안양천 변 공장에서 초과 밤샘 근무를 끝내고 산선 사무실(당산동)까지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왔어요. 오빠 학비를 대고 있었죠. ‘네 인생도 중요하다. 너를 위해서도 돈 모으거라’고 했어요. 라면 끓여주고 같이 울었습니다. 저는 18시간 일을 시키고도 초과 수당을 떼먹어 버스도 마음껏 못 타게 하는 회사에 분노가 치밀었어요. 이런 잔인한 짓 하도록 놔두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싶었죠.”(조지송 구술)

산선 건물 내의 성문밖교회 강단. 지금도 예배와 성경 공부가 이어지고 있다.
그 시대, 산업전도 주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였다. 조지송 총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로 대체했다.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독재 권력의 탄압 속에서 산업선교에 힘쓴 조지송의 삶을 두고 ‘바보들의 행진’(조지송 자작시 제목)이라고 표현했다. 조지송은 황해도 황주 출신으로 동네 사람들이 ‘꼬마 목사’로 부를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형이 평양신학교 출신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피난 열차를 타고 월남한 그는 그날 영락교회에서 눈물의 보리밥으로 허기를 때웠다. 6·25전쟁 중 미군 부대 잡일에 이어 그곳 군목실에서 일했다. 그는 신학교 졸업 후 강원도 석탄 막장에서 탄가루에 범벅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성령체험을 했다. 까만 예수였다.

‘노동절 예배’현장인 서울 당산동 산선 건물. 교단 및 국가 근대문화재다. 강민석 선임기자
“1970년대 말 투쟁이 아주 절정에 달했을 때 노동자들의 삶과 신앙이 지도할 수 없을 만큼 앞서 있었어요. …아 너희가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이구나. …네가 목사인 나보다 낫다고 나는 고백했어요.”

연보

·1951년 미군부대 잡역부·군목실서 일하게 됨
·1955년 오쇠리교회 개척 (현 서울 오쇠동)
·1961년 장신대 졸업 및 산업전도사연구회 참가
·1962년 탄광·철광·제철·방직 공장 현장 체험
·1964년 영등포산업전도 목사 부임
·1977년 1월 타임 ‘세계가 주목하는 올해의 인물’ 선정
·1983년 영등포산업선교회 사임
·1985년 청원(청주) 옥화리 ‘하나의 집’ 운영
·2009년 건강 악화로 성남 판교 이주

글·사진=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