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완·박인하의 만화는 시대다] 위트와 함께 가난·슬픔·평범함 담아내

국민일보

[한창완·박인하의 만화는 시대다] 위트와 함께 가난·슬픔·평범함 담아내

(20) ‘고인돌’ 박수동

입력 2020-05-23 04:03
박수동 화백은 평범한 캐릭터를 앞세워 일상의 비애와 기쁨을 탁월하게 그렸다. 가난을 다룬 ‘번데기 야구단’이나 작가의 출세작 ‘고인돌’이 대표적이다. 사진은 한국만화가협회 회원들과 함께한 박 화백(왼쪽에서 두 번째). 필자 제공

번데기 야구단의 주장 ‘뻔’이 골목을 돌아다니며 야구단원을 복덕방 본부로 불러 모은다. 감독인 복덕방 할아버지는 딸보 팀과의 경기에서 외야수 물꽁이 뜬공을 놓쳐 역전패했던 경기를 검토한다. 물꽁의 움직임이 이상해 살펴보니 앞뒤 호주머니에 간식으로 놔둔 번데기가 가득차 있었다. 주장 뻔은 “얌치같이 혼자 많이 먹으려고 했으며, 오늘같이 비상소집에도 나오지 않으니” 팀에서 빼자고 말한다. 그때 삼인분이 나서서 번데기를 가져간 건 집에서 배고파 울고 있는 동생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한다.

물꽁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좌판을 한다. 물꽁은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지만, 급식으로 나온 빵을 동생에게 가져다주고 시장에 나가 어머니의 일을 돕는다. 감독과 번데기 야구단원들은 물꽁이 어머니를 도와주는 시장에 간다. 물꽁 엄마가 “새벽 연습을 4시부터 하는 건 너무 빠르지 않아요?”라고 물어보고, 감독은 “4시라뇨? 우린 6시부터 연습하는데요”라고 답을 한다. 알고 보니 물꽁이 신문 배달을 하고 있었던 것. 장사를 끝낸 엄마와 집에 돌아오니 친구들이 돼지 저금통을 모은 동전을 놔두고 갔다. 엄마도 울고, 물꽁도 울며 “내 어떤 일이 있어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 고마운 친구들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다짐한다. 1976년 ‘소년중앙’에 연재를 시작해 1978년까지 연재한 ‘번데기 야구단’의 효자 물꽁 편이다.

가난을 어루만지다

1960년대 이후 만화는 어린이를 위한 매체였다. 1970년대 중반 고우영, 강철수의 성인극화가 반짝인기를 끌었지만, 어른들을 위한 만화는 심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퇴출당했다. 만화는 쇼윈도 상품처럼 바르고 선한 내용만 허락됐다. 1970~80년대 어린이들에게 사랑을 받은 명랑만화는 단독주택과 잘 정리된 골목, 학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갔다. 놀이공원, 시내 중심가, 시골 외가댁 등으로 무대가 확장돼도 세트장처럼 잘 꾸며진 공간만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가난의 풍경은 지워진다.

박수동은 다른 명랑만화와 달리 가난을 정면에서 다뤘다. ‘번데기 야구단’은 정식 리틀야구팀이 아니라 판잣집이 있는 변두리 도심 마을 번데기동의 동네 야구단이다. 그런 번데기 야구단이 국민학교 야구 결승에 진출한다. 번데기 야구단을 응원하기 위해 전국의 번데기 장수와 고물 장수들이 리어카를 몰고 서울운동장으로 모인다. 이처럼 판잣집이나 리어카 같은 보이고 싶지 않은 풍경이 박수동 만화에는 등장한다.

번데기 야구단. 필자 제공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어깨동무’에 연재한 ‘5학년5반 삼총사’의 주인공 삼총사 중 한 명인 뚝배기는 1화에서 “집안이 가난하여 중2 형이 물려주는 옷을 언제나 입고” 다닌다고 소개된다. 뚝배기도 물꽁처럼 엄마를 도와 새벽에 우유배달을 한다. 주로 개량된 양옥주택이 등장하는 다른 명랑만화와 달리 ‘5학년5반 삼총사’에서 뚝배기가 사는 동네는 오래된 기와집이 빡빡한 골목이 나온다.

명랑만화임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함께 슬픔도 자주 등장한다. ‘번데기 야구단’의 효자 물꽁, ‘5학년5반 삼총사’의 효자 뚝배기편이 대표적이다. 또 ‘신판 오성과 한음’의 육성회비 편은 훈장님이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진짜 있었던 이야기라며 들려준 에피소드다. 심마니 아버지를 잃고 장에 나가 장사를 하는 어머니가 어렵게 마련해 준 육성회비를 잃어버린 봉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집을 나간다. 엊그제 육성회비를 잃어버린 다른 친구 때문에 밤늦게까지 모두 고생을 했기 때문에 봉구는 잃어버렸다는 말도 하지 못한다.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벼락 바위에서 밤을 새운 봉구를 모두 함께 찾아 나선다. 어머니와 훈장님, 친구들이 나타나자 더 높은 곳으로 기어 올라가는 봉구. 그 위험한 모습을 본 친구 중 한 명이 자신이 가져갔다고 고백한다. 그 소리를 듣고 기절한 봉구를 어머니가 벼랑을 올라가 데려온다. 어렵게 돈을 벌어 육성회비를 마련해야 하는 가정 형편, 막무가내로 아이들을 대하는 호랑이 훈장, 목숨을 걸고 벼랑을 기어 올라가 아들을 데리고 오는 어머니의 모습은 모두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소년생활’ 별책부록으로 연재한 ‘별똥 탐험대’는 선사 시대 고인돌이 친구들과 엄마별을 찾아 우주여행에 나선 이야기다. 작은 배 하나를 타고 우주에 나가 큰 곰, 작은 곰, 사냥꾼, 견우와 직녀 등 별자리 주인공을 만나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여행을 한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장면, 엄마별을 찾아 엄마와 만나는 마무리 장면에서 모두 쏟아지듯 눈물을 흘린다.

여름방학. 필자 제공

1977년부터 1994년까지 ‘여성동아’에 연재된 ‘와이프행진곡’은 주인공들이 달동네 문간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무더운 여름날, 부엌에 대야를 놓고 물을 받아 들어가 있으니 대번에 주인집 아주머니가 말한다. “수돗물 아껴 써요. 지난달에 수도 값이 8000원이 넘게 나왔어!”. 속상한 아내가 적금과 집값을 계산하니 내 집 마련에 20년이 걸린다. 아내가 화를 하자 남편은 “왜 나 같은 놈에게 시집왔냐”고 다시 화를 낸다. 둘은 울며 화해하고, “아마 날씨 탓인가 봅니다. 신랑도 울고 각시도 한참 울었습니다”라는 내레이션으로 만화가 끝난다. 승진을 위한 남편의 노력, 새벽 3시에 일어나 연탄불을 가는 시대 풍경이 구슬픈 엘레지처럼 깔려있다.

무(無)의 만화, ‘고인돌’

우스개 만화는 캐릭터의 개성이 강할수록 유리하다. 개성 강한 캐릭터가 심술을 부리거나, 엉뚱한 발명을 하거나, 모험에 나서면 다른 이야기를 구성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박수동 만화 주인공들은 평범하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것 같은 친구들이다.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소년생활’에 연재한 ‘신판 오성과 한음’은 서로 친한 단짝 오성과 한음과 나이 많은 박떡배가 주인공이다. 오성과 한음, 박떡배는 심술을 부리는 악동 캐릭터가 아니다. 박떡배는 약삭빠르지 못해 매번 오성과 한음의 장난에 당하지만, 장난은 대개 목적이 있다. 박떡배는 장가를 간 사실이 친구들에게 알려질까 봐 전전긍긍한다. 오성과 한음은 장난을 기획해 박떡배가 스스로 혼인 사실을 고백하게 한다. 박떡배도 부끄러워하다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5학년 5반 삼총사’도 초등학생들에게 벌어지기 쉬운 문제를 해결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공부도, 싸움도 못 하는 아이들만 떠든 사람으로 칠판에 이름 적는 반장이나 태권도를 제일 잘해 아이들을 괴롭히는 권용팔 등의 문제가 삼총사식 솔루션으로 제자리를 찾는다.

박수동 만화의 따뜻함은 작가의 경험에서 나왔다. 박수동은 1941년 일본 도쿄 인근 오다와라에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일본에 이주한 부모님은 1945년 해방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했다. 돈 버는 일에 재능이 없었던 선비 같은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악착스럽게 일을 해 가족을 건사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어에 서툴렀던 박수동은 동네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한국어를 잘하진 못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공부하기 어려웠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가출해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다 대구에서 내렸다. 대구에서부터는 부산까지 줄곧 걸어갔다. 이후 6학년 2학기부터 특별한 일탈 없이 열심히 공부해 1960년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봄 서울에 상경할 때까지 단산, 초동, 밀양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가족을 위해 일을 하는 엄마에 대한 기억은 만화 속 효자 물꽁, 효자 뚝배기, 육성회비 편에서 잘 드러난다. 어린 시절 한국어에 서툴러 따돌림을 당했던 기억, 교사로 재직하며 아이들을 가르친 기억은 평범한 캐릭터들이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구조로 만화를 끌어가게 만들었다.

‘고인돌’ 캐릭터 컷과 표지. 필자 제공

박수동은 1974년 ‘선데이서울’에 성인만화 ‘고인돌’을 연재하며 어른들의 이야기를 두 페이지에 담았다. 주로 성적 은유를 담았지만, 삶에 대한 다양한 고민을 담은 아포리즘 같은 이야기도 많았다. 1992년까지 18년 동안 장기 연재한 ‘고인돌’에 대해 박수동은 2019년 출간된 복간판 서문에서 “자세히 보면 ‘없을 무’(無)자가 보인다”고 했다. 특출난 주인공 없이 동네 사람 몇이 다양한 화두를 던지고 결론을 찾는다. 마치 불교의 선화(禪畵)처럼, 작가의 말대로 ‘없을 무’의 만화다. 박수동 만화 특유의 이런 성격은 꼬불꼬불한 선으로 자유롭게 완성된 작가의 개성적인 그림으로 인해 더욱 도드라진다. 사보 등에 주로 한 컷 만화를 그리게 된 1990년대 이후에는 더 자유로워지면서 형식적으로도 선화에 가깝게 변화한다. 우스개 뒤 가난과 슬픔과 평범함을 담아낸 작가는 이제 또 다른 ‘없을 무’의 만화를 고민하고 있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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